정치

한홍구 교수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왜 성조기를 드는가 2탄: 70-80년대"

지혜롬

tbs3@naver.com

2018-03-0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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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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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용 인용시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과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2부



    [인터뷰 제 1 공장]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왜 성조기를 드는가 2탄: 70-80년대

    - 한홍구 교수(성공회대)


    김어준 : 어제 예고한 대로. 어제 사실 이 코너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거든요. 조만간 모시겠다고 해 놓고 저희가 1년 내내 안 모시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어제는 끝내자마자 바로 저희가 다시 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한홍구 : 안녕하십니까.


    김어준 : 이렇게 반응이 많았다는 것은 궁금했던 사람이 많았던 거죠. 가장 최근 3·1절만 하더라도 태극기하고 성조기를 일부 보수개신교에서 목사님들이 직접 나오고 신도들이 나와서 들고 개헌을 반대한다. 상식적으로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거든요. 성경에 개헌을 반대하라는 얘기가 나온 것도 아니고. 그리고 굳이 3·1절에 나온 것도 이해가 안 가고요. 그리고 거기서 고려연방제를 거론하는 것도, 모든 게 다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데 어제 70년대까지의 역사, 개신교가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목사님들 교회가 친일파가 되었고,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친일파의 재산들을 받아서 미국의 장려와 함께, 적극적인 장려와 함께 그런 재산을 받아서 보수개신교에 세를 얻어갔고, 그래서 그 과정에서 제주 4·3의 민간인 학살에 목사님들이 동원됐고. 이런 이야기들을 처음 듣는 분들도 굉장히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이건 역사입니다. 가치판단 없이.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어떡해요.



    한홍구 : 그러게 말입니다.



    김어준 : 어제 내용을 요약하는 겁니다, 짧게. 오늘 처음 들으신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본인이 기독교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기독교에서는 독재정권이라고 박정희 정권을 공격하는 상황이 있었고, 공격함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개신교가 미국의 선교사들하고 연결돼 있고 함부로 탄압할 수 없으니 본인의 필요에 의해서 보수 개신교를 적극적으로 정권보위의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 보수 개신교의 목사님들을 군대식으로 훈련하고 군대식으로 십자군이라고 조직을 만들어 냈는데, 그 조직을 일으킨 게 바로 최태민이다. 여기까지입니다. 짧게 요약 잘 했습니까?



    한홍구 : 훌륭하게 하셨습니다.



    김어준 : 여기까지 70년대에요. 여기에서 어제 얘기를 끝냈는데, 그러면서 이제 개신교에는 십자군전쟁으로 이것을 포장해서, 단순히 ‘박정희 정권을 보호해라.’ 이러면 나서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십자군전쟁으로 포장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 조직의 이름도 ‘십자군’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최태민, 거기까지 했습니다. 70년대 그렇게 해서 실제 최태민과 이 조직에 포섭된, 혹은 합류한, 협조한 대표적인 목사님들이 결국 실제로 진보적인 움직임을 탄압하는데 앞장서게 됩니까?



    한홍구 : 그렇기도 하고요. 목사님들이 많으니까 다른 분들이 또 나서서 진보적인 쪽을 탄압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최태민 목사하고 같이 일을 했던 분들 중에 나중에 한기총이나 그런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김어준 : 최태민 목사와 함께 일하다가 한기총에서 나중에 일하게 돼요?



    한홍구 : 나중에 그렇게 된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그러니까 문제는 지금 한기총이나 그쪽은 “최태민은 기독교가 아니었다.” 이렇게 부인을 하고 있죠.



    김어준 :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최태민 씨와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한홍구 : 기독교 주류 쪽을 확 빨아들였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일단 너무 이상한 데가 많으니까 약간 거리를 두는 분들도 있었고, 강신용 목사님 같은 경우도 초기에는 굉장히 깊이 관여를 했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최태민 쪽에서 이름을 더 이용하지 않는 것을 보면 거리를 두셨던 것 같기도 해요.



    김어준 : 강하게 합류했다가 이상하다고 떨어져 나간 분들도 있고.



    한홍구 : 뒤늦게 이상한 것과 상관없이 돈과 권력이 있다고 하니까 모여든 사람들도 있고.



    김어준 : 거꾸로 합류한 목사님들도 있고 합류했다가 떨어져나간 목사님들도 있고, 그리고 그 중 일부는 나중에 한기총의 간부가 된 분들도 있고. 지금 한기총은 최태민 씨를 전면 부인합니다, 물론. 기독교가 아니라고 부인하는데. 역사가 그렇다는 겁니다. 가치평가가 있는 얘기가 아니라 그렇다는 얘기고. 박정희 정권까지는 그렇게 개신교를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이후의 얘기를 하자고 모신 건데, 80년대 이후로 어떻게 된 겁니까?



    한홍구 :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민주화 운동에서 기독교의 비중이 좀 떨어지게 됩니다. 70년대까지는 워낙 용공시비가 심하니까 기독교가 아니면, 그러니까 해외와 굳건한 연관을 갖고 있고, 또 하나님을 모시고 있고. 그래서 저희가 그 당시에 70년대에 농반진반 ‘백이 두 개였다. 하나님 백이 있고 미국 백이 있었다.’ 하는, 그런 개신교들조차 용공시비에서 자유롭지 않았거든요



    김어준 : 그 두 개의 백이 있다는 건 그 당시에 유행했던 얘기입니까, 실제?



    한홍구 : 그 당시에도 농반진반 많이 했었습니다. 재야 쪽이 중요했는데, 80년 광주를 거치면서 민주화운동의 질과 양이 달라집니다. 전투력도 달라지고요. 그렇게 되면서 종교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70년대에 비해서는 중요성이, 전체 민주화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확 떨어지게 되고요. 그리고 또 전두환 정권에서도 박정희 때처럼 굉장히 미숙한 탄압일변도가 아니라 상당한 나름의 회유정책들을 썼습니다. 그리고 하나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게, 70년대 민주화운동을 했었던 개신교 쪽의 목사님들이나 지도자들도 대단히 친미적이고 대단히 반공적이세요.



    김어준 : 그건 생존의 기본조건이었으니까요.



    한홍구 : 그렇기 때문에 이분들이 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상당히 많은 분들이 전두환 정권하고 친하게 지냅니다. 기독교가 아닌 민주화운동 쪽에서도 그런 분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천주교에서도 예컨대 지학순 주교님 같은 분이 전두환 정권과는 그렇게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셨고요. 이런 부분들이 전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김어준 : 지금 말씀은 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독재라고 저항했지만 전두환 정권으로 넘어가면서는 전두환 정권과 가까이 지냈던 세력들도 있다는 거죠?



    한홍구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7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반박정희에 목표가 가있었고, 쉽게 얘기하면 이겁니다. 광주에 대해서는 눌러 담았던 거죠. 쉽게 얘기하면 젊은 세대하고는 그런 점에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70년대 우리가 존경하던 분들 중에 실명을 거론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적지 않은 분들이 전두환 정권과 타협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런 현상이 벌어졌고, 그렇지만 민주화운동 전체를 본다면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서, 그리고 광주라는 새로운 아젠다를 갖고 민주화운동은 크게 발전해 나갔고 그게 87년까지 이어지고요. 기독교와 관련해서는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게 1988년도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라는 대단한 중요한 선언이 나옵니다. 지금 딱 30주년이 됐고, 아마 그때 2월 29일인가 발표가 됐어요. 지금 이제 딱 30주년이 됐는데, 이 선언이 정말 중요한 게 뭐냐면 한국의 조금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이라고 할까요? 이쪽도 반공주의를 갖고서 반공주의 틀 안에서 움직였었는데, 반공주의하고 결별을 선언합니다.



    김어준 : 반공주의를 기독교가 넘어서기 시작한 게 처음에 88년이 되어서네요.



    한홍구 : 88년도에 뭐냐면, 그동안에 화해와 사랑의 종교여야 할 개신교가 너무 반목과 대립과 증오를 부추겨왔다. 그래서 반공과 증오를 부추긴 것에 대한 회개 선언을 한 겁니다. 그 죄책을 고백을 했는데, 이 선언을 읽을 때에 거기 모였던 분들이 정말 눈물바다가 될 정도로 이 선언 내용 자체는 대단히 훌륭합니다. 안기부에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정말 꼬투리 하나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대단히 훌륭한 선언이었고,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컸었고 여러 가지 충격파를 줬는데, 이게 예측하지 못한 이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김어준 :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어요.



    한홍구 : 반작용이 너무 세게 왔는데요. 바로 이 선언이 한기총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김어준 : 아, 그렇게 연결되는군요.



    한홍구 : 그래서 이 선언이 나오고 난 다음에 주요 기독교 지도자들, 특히 거의 대부분이 월남한 분들이죠. 10분 정도가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하고서 남한산성 쪽에 사시고 계셨는데 그 댁에 모여서 일종의 성토대회 비슷한 것을 하고, 우리가 가만있으면 안 되겠다 하는 식의 움직임을 보이고 그것이 몇 달 뒤에 한기총으로 나타나게 되고, 또 더 놀라운 일은 이 선언을 채택한 주체가 KNCC인데, 지금은 NCCK이라고 많이 불려지나요? 그런데 NCCK 내에서도 이 선언을 채택했던 사람들이 소수집단으로 전락을 하게 돼요. 그러니까 한국 기독교 전체의 보수화가 이루어지는데, 저는 이 보수화의 단계가 두 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정말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이 선언이 나온 뒤에 반작용으로 89년도에 한기총이 만들어 진 게 한 번이고, 그 지점은 바로 한국사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보수가 결집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예컨대 전쟁기념관 같은 게 만들어 지는 게 바로 그 시기입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이 2003년도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게 되면서 대형교회가 시청 앞에서 대규모집회를 갖게 되죠.



    김어준 : 대형교회들이 시청 앞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게 노무현 정부 들어서 입니까?



    한홍구 : 2003년입니다. 들어서기 직전이죠, 2003년 1월이니까.



    김어준 : 당선된 직후네요.



    한홍구 : 당선된 직후입니다.



    김어준 : 지금 한기총은 그때 시작해서 며칠 전에 3·1절운동도 한기총에서 한기총의 명의로 조직한 것이거든요. 한기총은 지난 30년 간 그 중심에 있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보수개신교들이 이렇게 정치적 발언을 하거나 집결하거나 할 때 그 중심에 서 있는 건데 그 출범이 ‘그동안 우리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데, 증오의 전파, 대결의 전파에 너무 앞장섰지 않느냐.’는 내부반성이 나오자 그 반동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런 역사가 있군요. 그분들이 길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게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 당선된 직후였다.



    한홍구 :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이건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변동하고 맞물려있는데요. 강남개발하고 맞물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어준 : 교수님의 해석으로는요? 왜 그렇습니까?



    한홍구 : 이제 부동산이 개발되는 게, 우리 강남에 교회가 확 생겨나고, 그러면서 이것이 뭐냐면 다들 잘 살고 싶고, 그런 개발의 욕망 같은 것들이 번져나가면서 이게 교회의 구도 속에서도 그렇게 되면서 대형교회들이 생겨나고 대형교회만 살아남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90년대 통계로 쳐도 전 세계 대형교회 50개 중에 23개가 대한민국에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 치면 아마 100대 대형교회에 한 80개정도는 대한민국에 있고, 그 중 60개정도가 서울에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김어준 : 이게 잘 피부에 와 닿지 않으실 텐데, 전 세계 기독교 인구에 우리나라가 몇 퍼센트 되지 않을 텐데, 전 세계로 치면.



    한홍구 : 그런데 전 세계에서 지난 냉전시기에 가장 성령대폭발한 게 한국입니다.



    김어준 : 그렇죠. 그런데 그 기준으로 보시면 우리나라의 교회가 얼마나 많고 얼마나 대형화되었는지, 그러니까 재벌의 성장사하고 비슷해요.



    한홍구 : 그러니까 완전히 동네 구멍가게 상권이 죽는 것처럼, 50명, 100명하는 정도의 소형이나 중형교회들은 다 죽어버리게 되고, 문제가 뭐냐면 신자수가 조금 늘었는데 일반교회에 가면 신자수가 팍팍 줄고 있거든요, 대형교회 제외하고는.



    김어준 : 없어지는 교회가 많아요.



    한홍구 : 그러니까 신자가 대형교회로 이동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문제는 뭐냐면, 신자가 늘어나기는 늘어나는데, 가장 주류 기독교 쪽에서 이단으로 얘기하는 여러 지파들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많이 되고 하는, 이런 쪽은 신자가 늘고 일반 전통적인 기독교 교회들은 궤멸수준에 가고 있는 겁니다.



    김어준 : 우리나라 재벌 성장사와 비슷합니다. 교회가 대형화되고 나머지는 계열사처럼 체인화 되고.



    한홍구 : 이게 또 하나 악영향을 끼치는 게 뭐냐면, 한국 사회가 교육수준도 높아졌잖아요. 그리고 중소교회는 공동화되고 그러면서 한국 사회에 힐링 바람이 불죠.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동안의 산업화, 근대화를 거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 특히 성장 신화를 내걸면서 쭉 달음질 쳐왔는데, 거기서 사실은 소외된 사람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일부는, 예컨대 순복음교회 같은 데서 삼박자구원으로 영혼과 몸과 재물.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걸로 해서 흡수되지만, 거기서 흡수 안 되는 분들이 예컨대 산기도원이라고 해서 전 세계 기독교에 한국밖에 없는 현상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산기도원하고 새벽기도.



    김어준 : 새벽기도가 다른 나라에는 없습니까?



    한홍구 : 없습니다. 60년대,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기독교에서 새벽기도를 거부하는 움직임도 상당히 컸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산기도원에 가 있었던 분들이 일반교회에서 감당하기 힘들거나 일반교회로는 만족을 못하는 분들이 훨씬 더 강렬한 체험을 원해서 갔는데, 산기도원이 그래서 작은 교회들하고 연결고리가 있었는데 작은 교회가 몰락하게 되면서 산기도원이 존립이 안 되니까 해체가 되고, 이분들이 거리로 나와서 이게 박사모하고…….



    김어준 : 한 번 더 모셔야겠습니다, 아무래도. 한홍구 교수님이었습니다.



    한홍구 :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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