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해영 "안익태, 일본 군국주의와 나치즘에 협력하고 부역했던 인물"

지혜롬

tbs3@naver.com

2019-01-15 00:48

프린트
색다른 시선
색다른 시선
  •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9. 1. 14. (월)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이해영 "안익태, 일본 군국주의와 나치즘에 협력하고 부역했던 인물"

    - 안익태, 일제시대 때 미·일·유럽 유학 모두 경험한 케이스
    - 안익태 친일,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 때 정점
    - 안익태 친나치 행적? 일본 유럽 첩보망-나치 외곽조직이 안익태 스폰서 역할
    - 안익태, 1955년 이승만 탄생 80주년 기념공연 위해 귀국하며 ‘애국지사’ 훈장 받아
    - 안익태 행적, 2차 세계대전·한국전쟁 거치며 은폐되고 신화화
    - 안익태, 이승만에 “미국 대사관 문화참사관 자리 달라” 청탁
    - 박정희, 안익태 정치적 활용하며 공생관계 맺어
    - 애국가 문제, 국민적 합의로 공론화하는 게 중요
    - 안익태 전력, 중요한 영상자료는 확보하고 있어


    ▶ 김종배 : 우리나라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이 사람이 친일 전력이 있었다라는 주장이 제기된 건 꽤 오래된 얘기죠. 헌데, 이 친일을 넘어서 나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한신대 국제관계학과의 이해영 교수가 최근에 펴낸 책, <안익태 케이스>라고 하는 책을 통해서 사료를 발굴해서 이렇게 주장을 했는데요.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이해영 교수 직접 연결해서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여보세요?

    ▷ 이해영 : 여보세요?

    ▶ 김종배 : 네. 안녕하세요, 교수님.

    ▷ 이해영 : 안녕하세요.

    ▶ 김종배 : 네. 이 책의 부제가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교수님께서 이 안익태라는 인물에 속칭 꽂힌 이유부터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 이해영 : 우선 케이스 자체가 그냥 독특하죠. 왜냐하면 일제시대 때 일본 유학, 미국 유학, 그다음에 유럽 유학을 다 경험한 사실 유일한 케이스 같고요.

    ▶ 김종배 : 그렇네요.

    ▷ 이해영 : 그다음에 또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애국가, 국가 대용으로써 애국가의 작곡가, 그렇지만 이분의 실체, 실체가 60년 가까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는 게 아무래도 저로서는 관심이 가던 분야였죠.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안익태의 어떤 친일 전력에 대해서는 사실 이제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이걸 담으면서 아마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됐던 결정적 계기가 이거였던 것 같은데요.

    ▷ 이해영 : 그렇죠.

    ▶ 김종배 : 그래도 한 번 일단 이 점부터 정리하고 가죠. 안익태의 친일 전력, 가장 대표적인 게 어떤 거죠, 교수님?

    ▷ 이해영 : 가장 대표적인 건 아무래도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를 본인의 작품으로 1942년 9월 18일 날, 그러니까 만주사변 10주년 되는 해죠. 그때 베를린에서 이 연주를 지휘한 게 아무래도 정점 중에 하나죠.

    ▶ 김종배 : 이때가 만주환상곡이었나요, 나오는 게?

    ▷ 이해영 : 만주국 환상곡입니다.

    ▶ 김종배 : 만주국이라는 게 말 그대로 일본제국주의 이른바 괴뢰국으로 역사에서 기록되고 있는,

    ▷ 이해영 : 그렇죠.

    ▶ 김종배 : 그런데 친일을 넘어서 친나치 행적이 지금 발굴이 됐다는 건데요. 어떻게 된 이야기입니까, 이 이야기는?

    ▷ 이해영 : 안익태가 1941년 연말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베를린으로 옮아가거든요, 옮겨가는데, 그 뒤 한 2년 반에 걸쳐 가지고 베를린에서 체재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체재했던 집이 에하라 고이치라고 하는 만주국 참사관의 집에 기숙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에하라 고이치가 누구인지, 이걸 제가 좀 파헤친 측면이 있습니다. 뭐냐면 미국 OSS, 지금으로 치면 CIA입니다. CIA가 전에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이 에하라 고이치라는 사람이 일본 첩보, 유럽 첩보망의 독일 총책이었다고 그러거든요.

    ▶ 김종배 : 그래요?

    ▷ 이해영 : 네. 그러니까 그 집에 2년 반을 기숙을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또 다른 한 축이 누구냐면 독일협회라고 독일과 일본 협회, 이런 말인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긴 이 독일협회가 민간친선단체로 알려져 있는데, 베를린에 있는 연방문서보관소에 있는 안익태 파일을 자세히 분석을 해보면 그게 전혀 아닌 거죠. 뭐냐면 나치의 외곽조직이었어요. 그리고 이 독일협회가 안익태의 유럽활동을 주선하고, 조직하고, 또 후원해 주는 아주 막중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한쪽엔 에하라 고이치라고 하는 일본의 유럽 첩보망의 독일 총책과 다른 한편에서는 나치의 어떤 프로파간다 외곽조직이 안익태의 베를린 활동을, 시절의 활동을 밀어주고 했던 게 되는 거죠. 스폰서 역할을 해 준 거죠.

    ▶ 김종배 : 그래요? 그런데 지금 교수님이 발굴한 내용 보면 우리가 이제 게슈타포라고 알고 있는 여기에서 안익태 이른바 사상검증을 해 가지고 전혀 문제가 없다라는 일종의 보증까지 섰다, 이런 내용도 있다면서요?

    ▷ 이해영 : 그렇습니다. 그게 43년 7월 달에 안익태가 제국음악원 회원증을 발부를 받아요. 그런데 이 내용을 자세히 신원보증에 나와 있는 걸 자세히 분석을 해보면 게슈타포죠. 나치 선전성에 게슈타포가 신원검증을 해 가지고 아무, 정치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음, 이런 어떤 신원보증을 해 줍니다.

    ▶ 김종배 : 게슈타포가 아무 하자가 없다는 이야기는 우리 입장에서는 거꾸로 해석을 하면 되는 거죠?

    ▷ 이해영 : 정치적으로 아무 하자 없음, 이게 내용입니다.

    ▶ 김종배 : 그러면서 그런데 이 당시에 유럽에서 상당한 공연, 이런 것도 있었다면서요?

    ▷ 이해영 : 그렇죠. 38년부터 44년 6월까지 대략 한 30여회의 공연을 가지는데, 연주를 가지는데, 앞에 한 두세 번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본 군국주의와 나치의 전쟁 수행을 프로파간다 하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 김종배 : 그래요? 그러면 안익태의 이런 어떤 공연의 뒤에는 일본의 지원, 그다음에 나치 독일의 지원이 있었다, 이렇게 보는 게 이제 맞는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고요?

    ▷ 이해영 : 네. 그렇게 보셔야 되죠.

    ▶ 김종배 : 네. 그리고 당시에 어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은 동맹관계에 있었던 거고요?

    ▷ 이해영 : 네. 군사동맹관계였죠.

    ▶ 김종배 : 그러니까 그러면 결국은 안익태라고 하는 인물은 일본 군국주의와 어떤 그러니까 이 나치즘에 전부 다 협력하고 부역했던 인물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되는 겁니까?

    ▷ 이해영 : 네. 그렇게 정리하시는 게 맞다고 봅니다.

    ▶ 김종배 : 그래요?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럼 해방 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까 이제 제가 교수님께서 쓰신 책의 이제 제목의 부제가 ‘국가상징에 대한 한 연구’라고 소개를 해드렸는데, 국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게 바로 지금 국가 아니겠습니까? 애국가의 작곡가로 지금 올라서게 된 결정적 계기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이해영 : 아무래도 안익태가 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에 스페인으로 넘어가거든요, 파리에서. 그 이후부터 1955년 처음 귀국할 때, 그때 이승만 탄생 80주년 기념 연주를 해서 귀국하는데, 그때 이제 애국지사로 귀국을 하는 거죠.

    ▶ 김종배 : 애국지사가 됩니까, 55년에 귀국을 할 때?

    ▷ 이해영 :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원장을 받으신 분이니까, 그 이후에도 60년대하고 65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안익태의 진실에 대해서 근 수십 년간 은폐되어 있었던 거죠. 그게 비로소 폭로되기 시작한 게 한 1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그런데 왜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이 역사적인 사실이 묻혀있었을까요? 저는 그게 궁금한데요.

    ▷ 이해영 : 제가 보기에는 일단 2차 세계대전이라는 것하고, 두 번째는 우리 한국전쟁, 이 기간을 경과하면서 안익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은폐되고, 동시에 터무니없이 신화화되는 그런 과정 속에서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안익태의 애국가가 마치 국가처럼 불리게 되면서 이게 고착화된 게 아니냐? 이렇게 보고 있는 거죠.

    ▶ 김종배 : 그런데 안익태라는 인물과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어떤 특수관계에 있었다고 봐야 되는 건가요? 어떻게 봐야 되는 겁니까?

    ▷ 이해영 : 그 부분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제가 처음 언급한 부분인데, 예를 들어서 안익태가 스페인에 있다가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가 국가처럼 불린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런 다음에 이승만에게 편지를 썼던 것 같아요. 그런 기록들은 남아있습니다. 그때 처음 보낸 편지 내용에서 자신이 미국 대사관의 문화참사관을 자리를 달라, 이런 청탁을 해요.

    ▶ 김종배 : 그래요? 네.

    ▷ 이해영 : 그리고 이걸 이제 이승만이 당시 거절하고,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청탁을 합니다. 아주 많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각종 청탁을 이승만한테 늘어놓는 거죠.

    ▶ 김종배 : 대놓고 합니까, 청탁을?

    ▷ 이해영 : 네. 편지로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아주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까지 다 청탁을 합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 당시 이걸 달러가 없다고 하는 이유로 다 거절을 하는 거죠. 그러다가 62년에 이제 이승만이 하야하고 난 다음에 박정희 정권 하에서 처음으로 서울국제음악제를 안익태가 요청을 해서 열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상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시절에 안익태의 부탁을, 청탁을 들어준 게 거의 없다고 봐야죠.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안익태 1955년에 귀국도 그런데 공연은 이승만 탄생 80년을 기념하는 공연이었다고요?

    ▷ 이해영 : 네. 그때 했죠. 그때 처음 와서 훈장 받고, 그다음에 군중들 앞에 애국지사로서 한국환상곡을 지휘를 하죠.

    ▶ 김종배 : 그리고 나서 그러면 박정희 정권이 되어서는 또 어떻게 관계가 맺어지게 되는 겁니까?

    ▷ 이해영 : 그러니까 이승만과의 관계가 그렇게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끝나게 되고, 그 이후에 다시 이제 박정희 장군, 그러니까 5.16, 예방을 해서 각종 선물을 교환하고, 또 당시 박정희 입장에서도 안익태, 애국가 작곡가가 안익태라는 사람이 애국의 심볼처럼 되어 있으니까 또 정치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겠죠.

    ▶ 김종배 : 네. 그래요?

    ▷ 이해영 : 그런 관계 속에 서로 공생관계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그러면 결국은 다시 마지막으로 드려야 되는 질문은 결국은 이 문제로 귀착이 되는 것 같은데요. 지금 우리가 애국가라고 부르는 이 곡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교수님?

    ▷ 이해영 : 애국가는 국가가 아닙니다. 그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누차 확인된 건데, 애국가는, 우리나라 그런 의미에서 법정 국가가 없는 셈이죠.

    ▶ 김종배 : 관련 법률이 없다면서요?

    ▷ 이해영 : 대통령령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에게는 구속력을 가지지 못 하죠. 그렇기 때문에 애국가는 여러 개가 있을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대한제국 시절에 보면 애국가가 한 서른 가지 정도가 있었었던 시절도 있었죠.

    ▶ 김종배 : 네.

    ▷ 이해영 : 그리고 대한제국 국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애국가는 여러 개가 있을 수 있고, 그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적 합의에 의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건지 공론화해서 합의를 도출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보는 거죠.

    ▶ 김종배 :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전에 인터뷰 과정에서 나왔던 안익태의 친일 전력이라든지 내지 친나치 전력과 관련해서는 객관적인 기록이나 사료를 다 발굴해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교수님?

    ▷ 이해영 : 100% 발굴했다고 하는 건 있을 수가 없죠. 여전히 중요한 음원, 악보, 이런 것들은 제가 몇 년 추적을 했지만 아직도 그런 것은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렇지만 매우 중요하고 확실한 이런 영상자료 같은 건 저도 다 확보를 하고 있는 거죠.

    ▶ 김종배 : 그래요? 혹시 아니, 이게 워낙 민감한 내용이다 보니까 예를 들어서 후손이나 관련 기념단체나 이런 데에서 반발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교수님?

    ▷ 이해영 :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이건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죠. 왜냐하면 증거 자체가 이야기하는 거니까,

    ▶ 김종배 : 그렇죠.

    ▷ 이해영 : 저처럼 그걸 전달하고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할 뿐이죠.

    ▶ 김종배 : 그래요? 알겠습니다. 또 한 번 우리 국민에게 화두를 던지는, 문제제기를 하는 이런 내용이라고 해석을 하면서 인터뷰는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 이해영 : 감사합니다.

    ▶ 김종배 : 지금까지 한신대 이해영 교수와 함께 했는데요. 혹시라도 이 인터뷰를 들으시고 반론할 내용이 있다고 생각을 하시면 저희에게 연락을 주시면 반론의 기회 열어놓도록 하겠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제공 tbs3@naver.com / copyrightⓒ tbs.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카카오톡 페이스북 링크

더 많은 기사 보기

개인정보처리방침  l  영상정보처리기기방침  l  사이버 감사실  l  저작권 정책  l  광고 • 협찬단가표  l  시청자 위원회  l  정보공개

03909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31 S-PLEX CENTER | 문의전화 : 02-311-5114(ARS)
Copyright © Since 2020 Seoul Media Foundation TB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