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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의 박학다설] 을씨년스러운 날을 아십니까

최은지

tbs3@naver.com

2018-11-16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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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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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해성의 박학다설] 을씨년스러운 날을 아십니까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8. 11. 16. (금)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 김종배 : 네. 우리 시대의 지식광대죠.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서해성 : 네,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지난주에 한 주 비우셔가지고 우리 애청자 여러분들 많이 아쉬워하셨는데, 어디 다녀오셨어요?

    ▷ 서해성 :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생기기 전에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언제 시간 되면 그 얘기도 같이 한 번 해볼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요. 또 이야기보따리 풀어주실 거라고 기대를 하고요. 오늘 어떤 이야기 나눠볼까요?

    ▷ 서해성 : 오늘은 을씨년스러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 김종배 : 일전에도 한 번 잠깐 말씀하신 적 있었어요.

    ▷ 서해성 : 우리 방송에서도 말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형용사는 태어난 날이 있습니다. 어떤 낱말이 태어난 날이 있다는 건 참 희한한 날이지 않습니까. 바로 11월 17일, 내일이죠, 그러니까. 하루 앞두고 있어서 딱 시기가 맞아서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1905년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장소도 있습니다. 중명전이라고 부르는, 덕수궁 권역에 있는 전각입니다. 서양식 전각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날 덕수궁 권역에 있는 중명전이라는 전각에서 이 말이 태어났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 김종배 : 이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이에요?

    ▷ 서해성 : 어떤 날씨나 사회적 분위기를 이를 때 쓰는 말입니다. 썰렁하고 스산하다.

    ▶ 김종배 : 오늘 날씨도 좀 비슷한 것 같은데.

    ▷ 서해성 : 네, 오늘 그렇죠. 우리 어렸을 적에 고등학교 다닐 적에 자주 했던 낱말의 형태소를 뜯어보면, (웃음)

    ▶ 김종배 : 갑자기 이야기가 너무 딱딱해지잖아요.

    ▷ 서해성 : 그렇죠. 형태소를 뜯어보면 ‘을씨년+스럽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누구나 다 아는 거죠. 을씨년은 적어도 명사겠죠. 명사가 아니면 ‘스럽다’를 붙일 수가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해서 조어로 태어난 것이죠. 을씨년을 대개 1905년, 곧 을사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을사년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 을씨년이, 그 말에 대해서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변형되어가지고 을씨년이 되었다, 이렇게 보는데. 이해조라는 하는 신소설 작가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쓴, 그분이 쓴 소설 ‘빈상셜’ 당시 발음으로는. 요새 말로는 ‘빈상설’ 1908년이 되면 이미 ‘을사년시럽다’라는 말이 소설책에 나오고 있습니다.

    ▶ 김종배 : 을사, 이때는 을씨년이 아니라 을사년스럽다.

    ▷ 서해성 : 을사년스럽다, 그런데 을사년시럽다. 그때는 ‘스럽다’가 아니고 ‘시럽다’ 이렇게 했는데 ‘만장 같은 집은 을사년시러워 꿈에도 가기 싫고’ 이런 문장이 아예 거기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분명한 건 그 이전에 이런 문장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마 이때쯤 생기지 않았는가 하는 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 김종배 : 어휘 추적하면 북한도 한 번 봐야 하는데, 북한도 이 말을 쓰고 있어요?

    ▷ 서해성 : 명백하게 이 말을 쓰고 있습니다. 분단 이전에 태어났던 건 확실한 거죠, 그러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이제 1905년 이전의 문서에는, 어떤 문학이나 다른 문서에는 이런 낱말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니까 을사년에서 왔다고 하는 그 말이 거의 확실하다. 이럴 땐 거의 100%다. 북한에서도 우리하고 굉장히 유사하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거나 매우 지긋지긋한 데가 있다, 할 때 을씨년스럽다는 말을 쓰고. 나아가서 ‘을스산하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더 강조된 말입니다. 이 말은 을씨년스럽고 스산하다. 그렇게 했을 때도 쓰고 있기 때문에 거의 확실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때 1905년에 생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1905년에 생긴 게 지금도, 오늘날에도 그대로 쓰고 있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죠. 그리고 오늘날에도 사실 이런 조어법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지난 정부 때 많이 썼던 게 ‘검사스럽다’

    ▶ 김종배 : 스럽다, 그렇죠. 스럽다란 표현 많이 쓰죠.

    ▷ 서해성 : 예. 그러니까 검사는 검사를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명사 뒤에 ‘스럽다’를 붙여서 형용사화 하는 거죠.

    ▶ 김종배 : 뭐뭐 같다, 이런 식으로.

    ▷ 서해성 : 기레기스럽다. 이런 말씀 참 안 쓰고 싶은데 댓글이나 인터넷에서 이런 조어들이 많이 나왔던 게 우연은 아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1905년에도 이와 같은 형태로 이런 말이 탄생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이런 말을 만들어낸 건 조선 민중들이었다는 겁니다. 대한제국 민중들이겠죠. 그렇게 해서 을사년을 우리는 이 낱말을 쓰면서 언제든지 을사년의 그 슬픔을 돌이켜볼 수 있는.

    ▶ 김종배 : 을사늑약.

    ▷ 서해성 : 그렇습니다. 한국 민중이 한국어에 남긴 슬픈 지혜라고 할까요, 그런 것이고요. 그런데 110년 이상 이 단어를 사용해왔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형용사로써 을씨년스럽다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을 기록하는 것, 불망의 기록을 이 단어를 통해서 남기고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29**님이 ‘서해성스럽다’는 말도 있다고 하는데요.

    ▷ 서해성 : 그렇군요.

    ▶ 김종배 : 이야기를 듣다 보면 빠져드는 상황을 일컫는 말. 바로 지금 만드셨습니다.

    ▷ 서해성 : 그런 뜻으로 이렇게 스럽다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바로 을사늑약 때문에 나왔다. 늑약, 억지로 맺은 조약을 얘기하는 겁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이게 중명전하고는 어떤 상관이 있는 거죠?

    ▷ 서해성 : 네. 중명전이라고 하는 것이 덕수궁 권역에 붙어있는 전각인데요. 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임금, 군주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전이라고 합니다. 일반인들은 살 수 없죠. 그런데 하나의 예외적인 조항을 두고 있는 게 절에 있는 대웅전이죠. 그건 스님들이 사는 곳이 아니고 석가모니가 사는 곳이죠.

    ▶ 김종배 : 부처님, 그래서 전을 붙이는 거군요.

    ▷ 서해성 : 네, 전을 쓰죠. 스님들이 사는 데는 전을 붙일 수가 없죠.

    ▶ 김종배 : 석가모니, 최소한 왕과는 동급 이상이니까.

    ▷ 서해성 : 숭유억불 사회에서 그렇게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런데 하여튼 일반적으로는 다 궁중에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중세 우리나라에는,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건물에 위격이 따로 있었습니다. 전이 제일 높고요.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이렇게 딱 순번이 정해져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 따라서,

    ▶ 김종배 : 잠깐만. 그러면 중국집에 있는 전당합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서해성 : (웃음) 그것은 위에서 떼어져 쓴 거죠, 그렇게 우리가.

    ▶ 김종배 : 그렇죠. 중국집도 전도 있고 당도 있고 합도 있고.

    ▷ 서해성 : 그 얘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지적을 했는데요. 중국하고 한국에만 황실 음식이라는 게 있습니다. 일본은 없습니다. 일본은 왕이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궁중요리라는 게 중국하고 한국에는 있습니다. 왜냐면 왕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 김종배 : 그렇죠. 수라간 상궁들이 나가서 음식을 만들고 상품화되고 이런, 저번에 잠깐 그런 말씀 해주셨잖아요.

    ▷ 서해성 : 그렇죠. 실은 그런 분들은 다 돌아가셨고, 그렇죠, 사실. 그런 음식인지 정확하게 확인해보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간에 중국하고 한국에는 그게 있고요. 일본에선 아예 궁중음식이라는 게 일본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왕이 있기 때문이죠. 왕이 타도된, 어쨌든 간에 왕이 없어진, 봉건이 실질적으로 타도된 그런 사회에만 궁중음식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프랑스에서 레스토랑이 널리 유행하게 된 것도 프랑스 사람들이 요리를 잘하는 거도 있지만,

    ▶ 김종배 : 귀족스럽게 하기 위해서.

    ▷ 서해성 : 왜냐면 베르사유 궁전에 있었던 당시에 일하던 집사들, 시종들이 5000명이었거든요.

    ▶ 김종배 : 와, 그렇게 많았어요?

    ▷ 서해성 : 예. 그중에 상당수가 요리사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나가서 뭐 했겠습니까?

    ▶ 김종배 : 생계를 일궈야죠.

    ▷ 서해성 : 그렇죠, 생계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레스토랑을 열어야 했고요.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를 많이 갔습니다. 왜냐면 왕들이 어떻게 밥을 먹었나 궁금하잖아요. 그러니까 의자도 빼주고 옷도 걸어주고 하면서 이제, 말하자면 완전히 귀족처럼 대해준 거죠. 그 대신 밥값이 비쌌죠. 바로 그런 것처럼. 바로 그것도 혁명으로 왕을 타도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하면 프랑스 고급 요리집이란 요즘 우리말로 하면 궁중요리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그렇죠. 아무튼 전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 서해성 : 그렇군요, 이걸로 또 5분을 까먹었군요. 이러다가 또 앞에 시작하다 가게 생겼습니다. 하여튼 간에 나중에 덕수궁에 불이 나게 되는데요. 그러다가 우리 고종황제 거처로 그 집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을사늑약이 거기서 체결된 이유도 그때 왕이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거기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래는 서양식 1층 건물이었는데요. 불이 나면서 이제 다시 2층 건물로 재건됐습니다. 그러니까 새로 지은 거죠, 신축이죠. 재건이지만 신축이죠. 그때 이름은 수옥헌이었습니다. 나중에 중명전이 된 것인데요. 그랬다가 나중에 1910년대가 되면 우리 왕이, 그때 이미 왕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니까 일본 이 사람들이 조선총독부가 서양인들에게 팔아먹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경성구락부, 영어로는 서울유니온이라고 했는데. 그걸 60년대까지 그렇게 서울유니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또 중간에 불이 나가지고요. 1925년에 불이 나가지고 외벽만 남기고 나머지가 다 소실돼서 또 새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에는 이게 국유재산으로 잠시 편입됐습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맞았습니다. 맞았는데 그때 오제도 검사, 유명한 반공검사지 않습니까. 거기를 좌익들이라고, 그 당시에 서울에 남아서 피난가지 못했던 사람들은 다 좌익 혐의로 몰렸지 않습니까. 사실은 그것은 국가가 사과해야 할 일이지, 국가가 이런 사람 불러서 조질 일이 아닌데. 자기들이 다리 끊고 도망갔으니까 피난을 못 가게 됐던 것인데 그 사람들을 취조하던 취조실로 사용됐습니다. 그래서 중명전 지하실에 죽어있는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런 증언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운의 공간.

    ▶ 김종배 : 우여곡절이 많네요.

    ▷ 서해성 : 예, 정말 우여곡절이 많은. 그랬다가 이제 박정희 정권에서 영친왕과 이방자가 이제 귀국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때 소유권을 여기 줬는데, 이분들이 또 이걸 한 10여년밖에 건사를 못하고 민간인에 팔았어요. 그래가지고 또 할 수 없이 민간인에 넘어가니까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끔 훼손되었죠. 그런데 제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때 77년 이후에 여기 살았던 분들이 증언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 김종배 : 누가 살았는지는.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그분들이 이 방송을 듣고 좀 나타나서 그때 살 때 보니까 이렇더라, 하는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 김종배 : 누군지도 모르는 거죠, 기록이 없어요?

    ▷ 서해성 : 그렇죠. 그러니까 좀 증언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이제 우리나라가 좀 살게 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집을 그냥 놔둘 수 있느냐, 해가지고 여차여차 해가지고 문화재청에서 이를 인수해가지고 다시 복원하게 돼서 오늘 우리가 가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건물 자체가 이 건물의 이력서만 가지고도 정말 무슨 드라마 한 편을 쓸 수 있는. 그냥 중명전, 이것만 가지고도 불타고 부서지고, 외국인이 살고, 취조실로 사용하고. 그리고 또 재밌는 게 바로 미국 공사관, 지금은 미국대사관저입니다만 이른바 하비브 하우스라고 부르는. 지금은 미국 대사관이 광화문 네거리에 있습니다만 원래는 정동에 있었거든요. 지금 미국 대사가 살고 있는 집입니다, 그러니까. 그것하고 담이 같이 붙어있습니다. 지금도 미국대사관저가 궁금하거든 바로 중명전에 가면 바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모티프가 하나 나오는데요.

    ▷ 서해성 : 정말 재밌는 이야기지 않습니까. 그럴 만큼 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중명전이란 공간을 딱 모티프로 해서 뭘 하나 짜면 제작비도 얼마 안 될 것 같고. 그렇죠? 그런데 중명이라고 하는 게 무슨 뜻이에요?

    ▷ 서해성 : 중명이란 말이 이제 무거울 중(重)하고 두 가지 중(重) 이렇게 하는 그 중 자에다가 쓰는데. 이 글씨를 쓴 사람은 중국 청나라 서예가가 썼습니다. 하소기란 사람이 썼는데. 대개 사전이나 인터넷 검색하면 밝을 명(明) 자로 나옵니다. 그렇지 않고 사실은 밝을 명(明)자보다, 날 일(日) 자가 아니고 눈 목(目)자를 쓴, 눈 목(目) 자에 달 월(月) 자를 쓴. 그런 명(&#30464;) 자가 있습니다. 그게 밝게 볼 명(&#30464;) 자입니다. 눈으로 본다 이겁니다, 눈 목(目) 자를 써가지고.

    ▶ 김종배 : 밝게 볼 명(&#30464;) 자?

    ▷ 서해성 : 네. 밝게 볼 명(&#30464;)자 해가지고 광명이 이어진다, 이런 뜻인데요. 그리고 글자는 밝을 명(明) 자를 쓸 때도 뜻이 좋습니다. 일월(日月) 밝을 명(明) 자를 쓰면 일월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일월이 함께 하늘에 있어 광명이 겹친다. 이 말은 무슨 얘기냐면, 일(日)은 바로 임금을 얘기하는 것이고, 월(月)은 신하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가 함께 있어서 직분을 다한다, 이런 뜻입니다.

    ▶ 김종배 : 여기서 중은 더블 이런 뜻인 겁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더블, 영어로 얘기하면 더블이죠.

    ▶ 김종배 : 겹으로 밝다는 거죠?

    ▷ 서해성 : 예. 그러니까 이름이 정말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나라가 기울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 지을 때 정말 잘 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왜냐면 순종께서 돌아가신 곳도 흥복헌이거든요. 의미가 굉장히 비슷합니다. 복이 흥한다. 이랬는데 거기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까 대한제국, 조선이죠. 대한제국이 완전히 망한 곳도 사실은 이름이 이하고 굉장히 유사한 것이었다. 중명이나 흥복이나 언어를 구성하는 방식은 유사하지 않습니까. 그런 곳에서 나라가 기울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군요. 그런데 아까 원래 이게 수옥헌이라고 하셨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수옥헌이란 말은 옥을 씻는다, 이런 뜻입니다. 옥을 씻는다는 건 옥을 실제로 씻는 게 아니고, 빗방울이 멋있게 떨어진다. 이를테면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 좋은 집이란 뜻으로 원래 지었던 거죠. 원래는 수옥헌이라고 했다가, 했다는 기록이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략 1899년에 독립신문에 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까지 자세히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만. 그리고 알렌 미국 공사지 않습니까. 알렌이 쓴 책에도 자기 공사관 바로 옆집이니까 거기에 대한 기록들이, 서양식 벽돌 건물이 있다. 이런 기록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1899년 아펜젤러, 우리 배재학당 세운 유명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아펜젤러가 찍은 사진에도 이제 이 수옥헌 건물이 들어있습니다. 거기는 단층 건물로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 김종배 : 배재학당이 바로 덕수궁 옆에 있었습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같이 있었죠. 그러니까 당시 정동·이화학당도 거기 있었고. 그러니까 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국 근대, 언제 한 번 이 시간에 정동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중명전은 빼고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중명전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때가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경운궁이 불난 이후에 고종께서 이리 옮기셨고. 그러다 보니까 대한제국에 있었던 중요한 행사, 접견. 순종이 이제 가례, 결혼식이죠. 가례를 올린 뒤에 외국인들 접견을 여기서 했던 그런 공간이고. 하물며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을사늑약도 체결되었고, 강요당했고. 그리고 헤이그 밀사 파견도 여기서 결정되어서 했던 거고. 고종이 마지막까지 임금으로, 황제로 재임하셨던 곳도 이 자리이고. 중명전은 우리 역사의 아주 깊은 운명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요. 오늘의 어찌 보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을사늑약 체결, 그때의 상황 아니겠습니까. 이 부분 말씀해주시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해 1905년 11월 9일 날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왕. 메이지죠, 그러니까. 한국에선 메이지 일본 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메이지가 바로 우리를 식민지화 시켰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좋아할 사람은 아니라는 말씀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때 동양 평화를 위하여서 이토 히로부미를 보내니까 그 사람 뜻대로 따라라, 라고 하는 친서를 우리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런 말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우리나라 통치를 우리가 하는 것이지. 그걸 보냈는데, 그러고는 이토 히로부미가 당시에 여기 와 있었던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하고 짜고. 군대는 하세가와가, 나중에 한국 총독을 했던 하세가와 사령관하고 같이 이렇게 해서 덕수궁 일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그리고 우리 대신들을 위협하고 매수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이제 이걸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11월 17일 날 바로 중명전에서 어전회의가 있었습니다. 고종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따를 수 없다, 이렇게 얘기했고요. 저녁에 시작했는데 자정이 되어서도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약문에는 11월 17일로 조약이 체결한 걸로 돼 있습니다.

    ▶ 김종배 : 자정이 넘었는데도?

    ▷ 서해성 : 네, 이미 써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 정부 동의가 필요했던 게 아니고 이미 써온 내용이었고, 실제로는 그날 자정이 넘은 이후에 동의를 받은 것으로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종이를 받았던 5명을 우리가 말할 때 을사오적이라고 말하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그런데 그 당시에 이걸 거부했던 사람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이 사람들은 불가했다. 당시에 8대신이 있었습니다. 8대신 중에 세 분이 거절했고 5명이 이걸 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 분도 같이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인 실무책임자는 일본에서는 하야시 곤스케였고요. 우리나라에서는 박제순이었습니다.

    ▶ 김종배 : 아, 이완용이 아니라 박제순이었다고요?

    ▷ 서해성 : 예, 그렇습니다. 이완용은 이제, 이런 얘기하면, 좀 우스꽝스러운 얘기 한마디 하자면 박제순은 이완용 덕분에 살아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완용이 모든 책임을, 모든 욕을 다 먹고 있기 때문에 박제순은 많은 사람들이 덜 알고 있는 거죠.

    ▶ 김종배 : 박제순 입장에선 이완용이 욕 받이네요, 그러니까?

    ▷ 서해성 : 그렇죠, 그렇죠. 사실은 을사늑약은 책임자가 박제순이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가 을사늑약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사실은 좀 가물대는 경우가 많아요. 어떻게 돼 있는 거죠?

    ▷ 서해성 : 정말 너무너무 간단한 내용입니다. 5개 항목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정말 나라가 망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항목에는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나라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다. 이 내용으로 돼 있고요. 두 번째 항목은 한국이 다른 나라와 맺었던 조약을 일본이 성실하게 수행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고요. 제3항이 통감을 둔다. 통감정이 시작된 거죠. 나머지 4항·5항은 사실상 일사만 한 겁니다. 그러니까 국민들이, 당시 백성인지 하여튼 식민인지 국민이든 간에 이 내용을 보자마자 나라가 망했다는 걸 정말 알 수 있었던 거죠.

    ▶ 김종배 : 그런데 이때 얘기 나올 때 가쓰라-태프트 밀약도 같이 나오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가쓰라-태프트가 우리가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사실은 가쓰라 다로라고 하는 당시 일본 총리하고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가 이제 동경에서 했던 회담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게 밀약이라기보다는 사실은, 미국은 오래전부터, 그전부터 한국이 자치 능력이 없다. 일본이 식민지배 하는 게 정당하다. 그렇게 하는 것들을 그 자리에 와서 재확인했던, 일본에서 재확인, 동경에서 재확인했던 그런 사건을 얘기하는 것이고요. 그들에게 보면 사건이 아니지만 우리한테는 어마어마한 사건인 거죠. 그 내용인즉 뭐냐면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은 한국을 점령한다는 그런 내용을 했던 거죠. 그런데 그것이 먼저 그런 내용을 먼저 합의한 채로 뉴햄프셔, 미국에 있는 군항 포츠머스에서 일본하고 러시아 사이의 러일전쟁에 대한 평화조약을. 강화조약이죠, 평화조약이라기보다는. 맺게 되었던 거죠. 유명한 포츠머스 조약인데 그때 이걸 중재했던 사람이 이른바 시어도어 루즈벨트. 그러니까 테디 베어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테디 베어.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12촌 형입니다.

    ▶ 김종배 : 12촌까지 따집니까?

    ▷ 서해성 : 그렇죠. 하여튼 12촌 형인데 이 사람은 공화당 사람이고요. 루즈벨트는 민주당 출신이죠. 같은 집안에서 대통령이 둘 나왔는데 당이 서로 다른 거죠. 그런데 이 평화회담을 중재했다는 이유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테디 루즈벨트가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 김종배 : 그 얘긴 처음 듣네요. 그래요?

    ▷ 서해성 : 예. 약자에게 강자가 말하는 평화라는 게 얼마나 폭력인가 잘 보여주는 게 정말 이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20세기 초반에 노벨평화상은 상당히 위험한 사람들이 많이 받았습니다. 언젠가 노벨평화상의 진실을 한 번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자들이 말하는 평화가 우리에겐 뭐였습니까. 식민지였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억압일 수가 있죠.

    ▷ 서해성 : 이게 참 그렇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바로 이 회담에 그 당시의 밀약을 했던 태프트가 그 바로 그다음에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사실은 그걸 했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저 사람 대통령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이게 참 기가 막힌 일이죠.

    ▶ 김종배 : 아까 박제순·이완용 얘기 좀 더 갔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거의 다 흘러가서 이건 좀 건너뛰어야 할 것 같고요. 36**님이 ‘내일이 을사늑약 체결일이네요. 조기를 달아야겠어요. 체결 반대한 대신들 기억하고 그 사실 잊지 말아야죠’ 반대한 대신이 있다는, 이것도 까먹으면 안 되는 거죠.

    ▷ 서해성 : 좋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이토 히로부미만 미워하는데 사실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사람은 하야시 곤스케입니다. 하야시 곤스케가 사실 우리를 국치로 이끌었던 실무책임자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서 우리나라 남산에, 바로 국치를 당했던 그 현장에 동상을 세워서 1936년도에 동상을 세워줬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

    ▶ 김종배 : 하야시의 동상을 세워줬다?

    ▷ 서해성 : 예. 그 동상의 잔해들이 남산에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제가 그걸 수습해가지고 국치터에 거꾸로 박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욕하실지 모르겠는데 말이 거칠다고. 그런데 거친 것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그래서 그 작품 이름이 ‘거꾸로 세운 동상’입니다. 실제로 거꾸로 처박혀 있습니다. 언제 한 번 시간이 되시면.

    ▶ 김종배 : 괜찮은데요. 남산에 있어요?

    ▷ 서해성 : 남산, 예. 중구 예장동 2-1번지에 있습니다.

    ▶ 김종배 : tbs 남산 시절에 좀 가볼 걸 잘못했네.

    ▷ 서해성 : 그때 안 가보셨군요. 그러니까 잊어버리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같이 드립니다.

    ▶ 김종배 : 자, 이제 좀 마무리를 해주시죠.

    ▷ 서해성 : 네. 우리가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 아마 조선 사람들이, 대한제국 사람들이 이 일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5년 뒤에 1910년 8월 22일 날 마침내 국치를 당했는데, 사람들이 그해 핀 꽃을 이르러서 망국초라고 불렀습니다.

    ▶ 김종배 : 맞아요, 그 말씀 하셨죠. 물망초 얘기 나오거나.

    ▷ 서해성 : 바로 지금 오늘날 우리가 망초라고 부르거나 계란꽃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꽃이 바로 그 해 핀 꽃입니다. 대한제국이 사라질 때 국권을 상실할 적에 사람들은 두 개의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을씨년스럽다’이고 하나는 ‘망국초’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태어난 날입니다. 내일이요, 17일.

    ▶ 김종배 : 11월 17일. 엄밀하게 보면 11월 18일이네요, 자정 넘어서.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런데 법적인 효력이 발생한 게 11월 17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잊어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오늘 우리가 이 방송을 같이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유엔이 정한 무슨무슨 날 우리 기억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만, 우리 역사에서 결코 잊어선 안 되는 날을 또 기억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마무리하고 서해성 작가와 인사 나누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해성 :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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