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해성의 박학다설] 열일곱 살 여인이 치마폭 속에 감춘 나라 ; 망국초를 아시나요
서해성 작가
서해성 작가

*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8. 8. 31. (금)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서해성의 박학다설] 열일곱 살 여인이 치마폭 속에 감춘 나라 ; 망국초를 아시나요

▶ 김종배 : 우리시대의 지식광대입니다.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서해성 :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네. 한 주 잘 보내셨고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이제 찬바람이 솔솔 부니까 지낼 만하죠?

▷ 서해성 : 네.

▶ 김종배 : 그러게요. 너무 더웠는데, 오늘 어떤 이야기 나눠볼까요?

▷ 서해성 : 8월이 가고 있습니다. 8월 마지막 날이지 않습니까?

▶ 김종배 : 오늘이 8월의 마지막날.

▷ 서해성 : 네. 그런데 사실 이틀 전이 8월 29일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8월 15일은 잘 기억하는데, 8월 29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 잘 모르고 있거든요.

▶ 김종배 :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 서해성 : 1910년 8월 29일 날 정오에 경복궁 근정전 앞에 이렇게 교차되어 있던 두 개의 나라 깃발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대한제국 깃발이고, 우리 태극기라고 부르는 거죠. 그 당시에는 명칭이 태극기는 아니었습니다. 태극기라는 말은 나중에 생긴 겁니다. 그리고 일본 국기가 이렇게 교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오에 일본 국기만 남고 대한제국 깃발, 국가깃발이죠. 태극기를 치우게 됐습니다.

▶ 김종배 : 경술국치?

▷ 서해성 : 네. 그래서 518년 동안 유지되었던 조선 대한제국이라고 불러야 되겠죠. 왜냐하면 한 번 나라를, 국호, 나라 이름을 바꿨으니까요. 27대 왕이 재임했던 조선 대한제국 운명이 다한 날입니다. 이른바 국치입니다.

▶ 김종배 : 맞아요. 8월 29일, 그 전에도 한 번 이날을 말씀해 주신 적이 있어요. 이날 서울의 풍경까지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납니다.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이때의 그러면 왕은 순종,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순종이 그날 이제 경술년, 융희 4년이죠, 그러니까. 1907년에 취임했으니까요. 융희 4년 8월 29일 날 황제로서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이른바 한일합방 포고문입니다. 순종의 마지막 공무, 황제로서, 왕으로서의 임무를 마지막으로 했습니다. ‘짐이 부덕으로 간대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한 이후’, 무슨 이야기냐면 내가 덕이 없어서 커다란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오늘에 이르도록 새롭게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누차에 걸쳐 도모하고 시험 삼아 힘씀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허약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고질이 되어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정말 긴긴밤 고민을 했는데,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을, 여기서 대임이란 나라의 통치를 얘기하는 거죠. 대임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과 효과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내가 결단을 내려서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이렇게 하셨고요. 그다음에 이제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고자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 김종배 : 이때 통감이 있었죠, 일제?

▷ 서해성 : 네. 통감이 있었습니다. 데라우치, 3대 통감이죠, 그러니까.

▶ 김종배 : 데라우치?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최초의 통감,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고요. 데라우치가 이제 포고문을 또한 발표했습니다, 조선 사람에게. 그런데 이 내용을 들으시면 이게 방송 들으시다가 브레이크 밟거나 그러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선 고래의 유폐는, 옛날부터 있었던 이 폐단은, 좋아함과 싫어함이 서로 거스르고 이익만을 위하여 서로 싸우는데 있으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서로 필적하고 배척하는 것이 그 끝을 알 수 없다가 마침내 파산하고 망한 집안이 적지 않다. 조선이 그러니까 망한 게 일본의 침략이 아니라 그냥,

▶ 김종배 : 지네들끼리 지지고 볶다가 망한 거다, 이거잖아요, 한 마디로 얘기하면?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포고문 내용이 정말 이렇게 되어있어요?

▷ 서해성 : 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원문입니다. 일본어로 쓴 걸 한국어로 번역한 겁니다. 그리고 이제 일왕, 메이지라는 사람이죠. 일왕 메이지를 굉장히 좋아하는 한국인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메이지 때 우리가 일본에 의해서 강탈되었다고 하는 것을 안다면 그런 말을 못할 텐데

▶ 김종배 : 메이지유신 하고 이러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한 사람도 굉장히 좋아했었죠.

▶ 김종배 : 네. 그 유신이라는 말을 그대로 갖다 썼잖아요.

▷ 서해성 : 그렇죠.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내린 조서, 왕의 말이라는 뜻이죠. 조서는 이렇습니다. ‘영구히 한국을 제국에 병합케 한다. 한국 황제 폐하 및 그 황제의 각원은, 황실 각원은 병합 후라도 상당한 예우를 받을 것이며, 민중은 직접 짐의’, 일본왕을 얘기하는 거죠. ‘짐의 위무 아래 그 강복을 증진할 것이며, 산업과 무역은 평온한 통치 아래서 현저한 발달을 보이기에 이를 것이니, 동양의 평화가 이에 의하여 더욱 그 기초를 공고하게 함이 짐이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같은 날 나온 역사적인 3개의 문건의 원문이긴 합니다만 약간 중요한 부분들만 골라서 읽어봤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 국치를, 국치에 다다르게 됐던 조약이 있지 않습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어떻게 되어있었어요, 내용이?

▷ 서해성 : 조약문 내용은 아주, 딱 8개 조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간단한 거죠. 일본이 그 당시에 이제 이런 경험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을사늑약은 5개 항목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누가 읽어봐도 이게 나라가 망했다는 걸 알 수 있었고요. 경술국치라고 우리가 부르는, 일본말로 이제 일한병합문서의 그 문장은 아주 정말 간략한 내용입니다. 간략하다 할 정도로 간단한 내용입니다. 앞에 전문은 생략하고, 전문이야 뻔한 얘기일 테니까요. 그 내용의 핵심이 ‘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그리고 일본의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그걸 전권위임장을 임명하여서 아래와 같은 협정을 체결한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이게 제1조입니다. ‘제2조, 일본군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 김종배 : 수락이라고,

▷ 서해성 : 수락하고, 네.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이 표현은 지금 우리가,

▷ 서해성 : 우리가 갖다 바치는 거잖아요.

▶ 김종배 : 갖다 바쳤다는 뜻이잖아.

▷ 서해성 : 그 말입니다. 이 조약문대로 한다면 일본은 별로 원치 않았는데, 우리 왕이 나라를 다스려달라고 지금 바쳤다는 거예요.

▶ 김종배 : 그러니까요.

▷ 서해성 : 제3조 내용은 귀족들에 대해서 대우한다 하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이런 체면을 유지하고 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세비(歲費)라고 요새 국회의원들이 쓰는 그 말의, 한국어에 들어온 이것이 처음입니다.

▶ 김종배 : 국회의원들 받는 월급을 세비라고 하는데, 그럼 이게 여기서 온 거예요?

▷ 서해성 : 여기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참 이게 안 써야 되는 대표적인,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정말 안 썼으면 좋겠다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원래 일본에서 나온 말이 일한병탄문서, 우리로서는, 병탄문서 제3조에 나오긴 합니다만 원래 일본에 쓰던 말입니다. 일본 왕이 귀족들이나 국회의원들에게 주는 돈, 세비라는 말은 규칙적으로 돈을 준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세뱃돈처럼 절을 하면 돈을 준다, 이런 뜻에 가까운 말이거든요.

▶ 김종배 : 그렇군요.

▷ 서해성 : 그런데 왜 국회의원들한테만 이 잘못된 말이 여전히 남아가지고,

▶ 김종배 : 그러게요.

▷ 서해성 : 국회의원 그냥 월급이라고 하면 되는데,

▶ 김종배 : 그러니까,

▷ 서해성 : 왜 세비라고 하는지 국회의원만 그 언어를 독점하고 이상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 김종배 : 이것 한 번 진짜 물어봐야겠는데, 왜 그렇게 하는지, 진짜.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그 세비라고 지금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5조가 아주 중요한 항목인데요.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 이것은, 은금이라는 것은 이제 은사금을 얘기하는 겁니다. 은사금을 준다.

▶ 김종배 : 귀족 작위 준 것,

▷ 서해성 : 그리고 돈을 주는 걸 얘기합니다.

▶ 김종배 : 백작, 남작, 그때 이완용의 작위가 어떻게 됐었죠?

▷ 서해성 : 이완용은 백작을 받았습니다.

▶ 김종배 : 백작이었죠.

▷ 서해성 : 박영효는 처음부터 후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7조는 이제 이 훌륭한 사람들은 제국의 관리로 등용한다. 제8조는 이제 반포, 이건 이제 바로 반포일로부터 시행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 김종배 : 아니. 제일 열 받는 게 양여를 수락하고,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이 대목에서 그냥 확 오는데,

▷ 서해성 : 이럴 때 피가 솟구친다고 하는 말이죠. 이 문서는 8월 22일 날 작성했습니다. 발표는 8월 29일 날 했습니다만 그러니까 이날 조약의 효력이 사실상 8월 22일부터 발효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일주일 간 눈치를 본 겁니다.

▶ 김종배 : 그러네요.

▷ 서해성 : 눈치를 보다가 8월 29일 날 발표를 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지금 65**님이 문자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몰라서...’ 이러면서 ‘그래서 그저께 구리에서 강변북로로 이동하는데, 국기가 조기로 게양됐었군요.’

▷ 서해성 : 훌륭한 지자체네요.

▶ 김종배 : 슬픕니다, 이런 문자를,

▷ 서해성 : 구리시에서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정말로 뜻이 있는 지자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요. 아무튼 지금 이제 이 조약문은 일주일 전에 이미 작성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전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한국을 먹어치워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로서는 동학혁명의 실패, 일본으로선 청일전쟁이죠. 그때부터 본격화되어서 마침내 러일전쟁을 승리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1904년에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고요. 그리고 2차 한일협약을 그 이듬해 체결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을사늑약입니다. 11월 17일 날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왔고, 그리고 이제 2대 총감으로는 소네 아라스케라는 사람이 왔고, 아까 이제 얘기했던 데라우치가 3대 통감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1907년에 헤이그밀사 사건이 있었는데, 우리 주권국가로서 당연히 우리 독립을 외치는 이유인데, 그걸로 이제 고종을 양위케 했습니다. 그걸 협박하고 을러댔던 사람이 이제 이완용이라는 사람이죠. 우리 황제를 을러댔던 거죠. 1907년 7월에 그리고는 한일신협약, 우리로서는 주로 부르는 말이 정미칠조약입니다.

▶ 김종배 : 정미칠조약, 네.


▷ 서해성 : 네. 정미년에 7개 조약을 맺었다는 거죠. 그중에 이제 그 문서엔 직접적으로 나타나있지 않은데, 이른바 비밀각서를 정미칠조약 할 때 체결했던 게 한국 군대를 해산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리고는 7월 30일 날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런데 한국 군인들 그냥 흩어지지 않았죠. 시가전을 펼쳤고, 일본군에 밀리니까 나중에 산으로 올라가서 본격적인 의병활동이 시작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완용이 참 얼마나 문제가 있는 사람이냐면요, 그냥 개인적인 걸 얘기하진 않겠습니다. 이제 그때도 순종황제의 칙어가 발표됩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짐은 이제부터 군사제도를 쇄신할 생각 아래 사관, 우리가 말하는 사관생들 얘기하는 겁니다. 사관을 양성하는 데 전력하고, 뒷날에 징병제를 발표하여 공고히 병력을 구비하려 한다. 그렇게 되어 있고, 마지막 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에게 의뢰하라.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우리 순종이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는데, 그러니까 자기를 보호하는 군대가 없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이게 밝혀졌는데, 이토 히로부미하고 이완용에 의해서 위조된 칙령입니다. 우리 군대 해산 자체가 우리 왕의 명령도 없이 군대가 해산된 것이죠. 그리고는 이제 군대 해산뿐만 아니라 신문지법, 보안법 등을 제정을 했고요. 1909년에 이르게 되면 한국의 사법부에 관한 것, 또 감옥, 그때 이제 감옥이라는 말이 처음 생겼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일본말입니다, 감옥도. 우리말로는 그냥 옥이었습니다.

▶ 김종배 : 맞아요, 옥.

▷ 서해성 : 네. 감옥 사무를 일본정부에게 위탁하게 되는 기유각서를 체결하고, 그렇게 해놓고서 이제 사법, 감옥, 다 만들어놓고 나서 그때 이제 생기게 되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서대문형무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는 그해 9월부터 이제 한국의병들, 남한대토벌을 시작합니다. 그 일본인이 편찬한 책, 일본경찰이 편찬한 책 이름이 뭐냐면 ‘조선폭도토벌지’입니다. 그런데 그 폭도토벌지에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군하고 우리 의병이 교전한 횟수가 2,819회입니다.

▶ 김종배 : 그렇게 많아요?

▷ 서해성 : 국내에서만 3천여 회에 달하는 교전을 벌였고, 의병으로 14만 명이 참가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요, 정말로 중요합니다, 여러분. 청취자 여러분, 정말 중요한 말인데, 우리 현재 인구 비례로 우리 군인만큼에 달하는 숫자인 겁니다, 이 숫자면.

▶ 김종배 : 그렇죠. 지금 우리가 한 6,000만 명 정도 되니까,

▷ 서해성 : 네. 인구가 그 당시 2천만 정도 됐거든요.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 김종배 : 14만이라는 숫자는 어마어마한 숫자죠.

▷ 서해성 : 일본군이 기록한 겁니다, 우리가 기록한 게 아니고. 그리고는 우리 의병 사망자수가 만 3천여 명에 이릅니다.

▶ 김종배 : 상당한,

▷ 서해성 : 아, 잘못됐습니다. 우리가 1만7,688명이 사망했습니다. 14만 명 중에 2만 명 가까운 사람이 사망했는데, 7분의 1 정도, 8분의 1 정도가 사망했다는 겁니다. 여덟 분 중에 한 분이 전투에 참가해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이 땅이 어떻게 지켰는가, 한 번 생각해보면 국내에서 아직 일본이 병합되기 전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가 하는 걸 같이 늘 이 국치 날이 되면 같이 생각해야 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김종배 : 격렬하게 저항을 했고, 그랬던 거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렇게 해서 다 토벌이 된 겁니다. 토벌이라는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일본이 그렇게 썼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 쓰겠습니다. 돌아가신 거죠. 왜 이제 1910년 8월 29일쯤이 되어서 일본이 우리를 일본말로 합방을 하냐면요, 바로 우리 남쪽에 남아있던 여기서 말하는 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이런 데를 얘기하는 겁니다.

▶ 김종배 : 삼남지방.

▷ 서해성 : 삼남지방에 있는 의병들을 완전히 토벌해서 더 이상 무장저항세력이 씨가 말랐다고 판단이 될 때 비로소 병합했던 겁니다. 날짜를 따지는 게 무슨 대단한 외교적 노력이라도 한 게 아니라 우리 의병이 완전히 소탕됐고, 더 이상은 무장투쟁이 국내에서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리고서, 물론 있었습니다. 소수가 있긴 했습니다만 그런 단계가 오니까 이제 합방문서를 발표했고, 합방문서를 만들어놓고서도 일주일 동안 또 눈치를 봤던 거죠.

▶ 김종배 : 그러니까 정미칠조약 1907년부터 10년까지 3년 동안 씨를 말려놓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그다음에 일본식, 걔네들 관점으로 보면 평정해놓고, 이제 뒤탈 없을 것 같으니까 마지막 형식적인 절차에 들어갔다, 이런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이완용이 남긴 기록은 없어요?

▷ 서해성 : 이완용이 남긴 기록이 있죠.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있습니다. 전문은, 원문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완용 일대기를 기록한, 이완용 호가 일당입니다.

▶ 김종배 : 일당?

▷ 서해성 : 일당, 집이 하나다, 그 말입니다. 육당, 이런 것처럼 일당기사, 이완용이 살았던, 영어로 얘기하면 크로니클(chronicle), 그 말입니다. 1927년에 그 책이 나왔는데요. 그날 8월 22일 날, 조약문이 체결된 건 8월 22일이니까 음력 7월 18일, 그날 이완용이 남긴 메모가 있습니다. 원문 그대로입니다. ‘황제 폐하의 소명을 받들기 위해 흥복헌에서 예알하고 칙어를 받드사 전권위임장을 받아 곧장 통감부로 가서 데라우치 통감과 회견하여 일한합병조약에 상호조인하고 동 위임장을 궁내부에 환납하다.

▶ 김종배 : 이 짧은 구절에 제가 두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데, 무슨 황제 폐하가 소명을 주긴 뭘 소명을 줬겠어요. 지가 그렇게 해놓은 거고,

▷ 서해성 : 그렇죠.

▶ 김종배 : 그다음에 이걸 이렇게 드라이하게 씁니까?

▷ 서해성 : 한 문장입니다.

▶ 김종배 : 이렇게 건조하게?

▷ 서해성 : 놀라울 정도로 한 문장이에요.

▶ 김종배 : 아무런 정수도 없잖아요, 지금.

▷ 서해성 : 그런데 그날 일본이 그 입회해 있었는데, 일본인이 쓴 걸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일본인은 이 사람 당연히 일본제국주의자죠. 당시 일본인으로서 궁내부 사무관이었던 곤도 시로스케는 이렇게 남겼습니다. ‘긴장하기보다는 오히려 한 나라의 운명이 여기서 결정되고 마는구나 하는 몹시도 슬픈 느낌을 갖게 하였다.’

▶ 김종배 : 일본인이 이렇게 썼다고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이완용 것하고 정말 대비된다, 정말.

▷ 서해성 : 이완용이라는 사람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여기 있는 이 기록조차도, 이 짧은 기록조차도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통감부에서 체결한 게 아니라 남산에 있던 통감 관저에서 체결했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네. 왜냐하면 통감부에 가게 되면 여러 직원들이 알게 될까봐서 통감 관저에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관청에서조차 망하지 않고,

▶ 김종배 : 그러게요. 관저라고 하는 게 통감이 사는 곳이잖아요.

▷ 서해성 : 사는 집이죠. 사는 집 위에 있는 그 2층에서 망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이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라도 소문이 나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 김종배 : 그 통감 관저가 지금 남산, 그쪽에 있는 데죠?

▷ 서해성 : 서울시 중구 예장동 2-1번지에 있습니다.

▶ 김종배 : 주소까지,

▷ 서해성 : 네. 한 번 꼭 가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사실 거기다 뭐 이렇게 표식도 해놨고, 제가 서울시 감독으로 일하면서 그렇게 해놨습니다, 거기.

▶ 김종배 : 그러니까요. 그런데 저항한 사람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 서해성 : 네. 사실 오늘 진짜 얘기하고 싶은 분은 이분입니다. 창덕궁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조선의 3대 궁궐 중에 하나지 않습니까?

▶ 김종배 : 네.

▷ 서해성 : 창덕궁 대조전에 붙어있는 작은 전각이 있습니다. 흥복헌입니다. 사실은 임금께서는 헌(軒)에 사시는 게 아닙니다.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전당, 전에 사는 겁니다.

▶ 김종배 : 전에 살죠. 맞아요.

▷ 서해성 : 전, 당, 합, 각, 재, 헌, 루, 정,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이제 헌에 사셨어요, 일본인들의 농간에 의해서. 그런데 여기서 일본에게 나라를 넘기는 마지막 어전회의를 하셨고, 여기서 또 돌아가셨습니다. 창덕궁에 가시거든 혹시 그 흥복헌에 한 번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을사늑약은 체결했던 것이 중명전입니다. 직역하면 밝고 밝으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흥복헌도 직역하면 복되고 복되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이름을 잘 지어야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데 그날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병풍 뒤에서 이 회의를 듣고 있던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 순종황제의 부인, 그러니까 순종효황후였습니다.

▶ 김종배 : 황후가?

▷ 서해성 : 황후 윤 씨가 듣고 있다가 이게 마지막 어전회의라는 걸 들으니까 그 병풍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황제의 옥새를 치마폭 속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울부짖었습니다. 옥새를 넘겨줄 수 없다. 이분이 이제 황후지 않습니까? 감히 나설 수가 없었어요.

▶ 김종배 : 신하들이?

▷ 서해성 : 네. 신하들이 나설 수가 없죠.

▶ 김종배 : 당연하죠.

▷ 서해성 : 왜냐하면 그러려면 황후를 넘어뜨리고 치마폭을 걷어 올려야 되지 않습니까?

▶ 김종배 : 큰일 나죠.

▷ 서해성 : 네. 그렇게 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이분 윤 씨였거든요. 그런데 윤 씨였는데, 그때 그 현장에서 그 아버지였던 윤택영과 큰아버지 윤덕영이 거기 와있었습니다. 혹시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르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는데,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그리고는 우리 윤비, 그러니까 우리 황후를 넘어뜨리고, 그 두 아버지하고 큰아버지가 넘어뜨리고, 그 옥새를 빼앗았습니다.

▶ 김종배 : 그 아버지하고 큰아버지는 어떤 사람들인데요?

▷ 서해성 : 제가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때 우리 황후의 나이가 17살이었습니다.

▶ 김종배 : 그때가? 그 시점에서?

▷ 서해성 : 네. 17살, 굳이 요즘 말로 하면 소녀겠죠. 결혼을 하셨기 때문에 소녀라고 할 수는 없고, 17살 여인만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때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518년을 유지해온 대한제국은 17살의 여인의 치마폭 속에서 가녀린 숨을 몇 분간 쉬고 있었던 겁니다.

▶ 김종배 : 물론 그전에 14만 명이라고 하는 의병이 있었지만,

▷ 서해성 : 네. 있었지만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얘기입니까? 그날 저항했던 사람은, 유일한 사람은 17살짜리 소녀였다는 겁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요. 그냥 신하들은 그냥 꿀 먹은 벙어리였답니까?

▷ 서해성 : 아니죠. 꿀 먹은 벙어리 정도가. 그건 침묵은, 나라를 넘기는데 침묵한 것은 매국이죠. 어떻게 꿀 먹은 벙어리입니까? 그때 저항하지 않는 관료라는 것은 관료가 아닌 거죠. 관료는 뭐하라고 있는 겁니까? 그럴 때 나라를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

▶ 김종배 : 네. 그렇게 됐고, 아무튼,

▷ 서해성 : 그 부모들은, 우리 황후는 이렇게 훌륭했는데, 그 아버지 윤택영은 우리 황후를, 딸을 황후를 만들기 위해서 그 당시 돈 50만 원을 로비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안국동에 있는 가장 좋은 집이 만 원이 안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네. 이 사람 별명이 뭐였냐면 차금대왕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빚쟁이대왕이었다, 그 말입니다.

▶ 김종배 : 빌린다. 네.

▷ 서해성 : 그뿐만이 아니라 이 돈을 순종이 갚아줬는데, 그 뒤에도 수많은 돈을 빌려 쓰고 흥청망청, 빚쟁이대왕이고, 나중에 빚을 져가지고 나라 밖으로 도망갔어요, 중국으로.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해방될 때까지 못 들어왔습니다.

▶ 김종배 : 해방될 때까지 살았어요?

▷ 서해성 : 네.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고 그 큰아버지 윤덕영은 별명이 대갈대왕이었는데, 제가 신체특징까지,

▶ 김종배 : 들어본 것 같은데,

▷ 서해성 : 여러분, 혹시 서울 서촌이라고 오늘날 잘못 부르고 있는, 서촌이라 불러서 그냥 그렇게 말하겠지만,

▶ 김종배 : 효자동 저쪽 얘기하는 건가?

▷ 서해성 : 네. 서촌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얘기하면 또 길어서 안 하겠습니다. 하여튼 서촌이라 언론에서 부르고 있는 그 일대가 전통가옥이 많았을 거라 생각을 하면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거기 그 땅의 대략 2분의1 정도는 윤덕영 개인 집이었습니다, 그냥.

▶ 김종배 : 그랬어요?

▷ 서해성 : 네. 서촌 전체가 그냥 윤덕영의 2분의 1이 그렇고, 그중에 다시 반이 이완용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통가옥이 많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그 나머지 자투리땅에 일반인이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그 벽수산장이 그렇게 컸는데, 그 끝에 박노수미술관이라 지금 가면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서촌 북쪽 끝에서부터 거기까지 이어지는 것이 윤덕영의 집이었습니다. 박노수미술관이 윤덕영이 자기 며느리에서 선물로 지어준 거예요.

▶ 김종배 : 떵떵거리고 살았군요, 한 마디로?

▷ 서해성 : 떵떵거렸다고 할 수가 없죠. 그 이상, 그리고 어마어마한 대저택을 짓고, 거기에 살았던 거죠. 그러니까 그런 아버지 세대에 비하면 우리 황태자비,

▶ 김종배 : 황후.

▷ 서해성 : 우리 황후께서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요. 이분이 나중에도 인민군이 이제, 거기 사시고 계셨거든요. 그런데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감히 여길 어디 들어오냐고, 국모가 사는 곳에, 6.25 때 쫓아냈다는 그런 실제 기록이 남아있고요.

▶ 김종배 : 그때까지 살아계셨군요.

▷ 서해성 : 66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이 이분을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 김종배 : 이분이야말로 국모네.

▷ 서해성 : 네. 진짜 정말 체통을 지키신 분이십니다. 나중에 이승만 정권에서 창덕궁이 국유재산으로 귀속되었으니 궁에서 나가라, 이분이 나가셨어요. 그런데 참 재미있죠. 4.19혁명을 통해서 이분이 창덕궁 낙선재로 황궁을 했습니다.

▶ 김종배 : 그랬어요?

▷ 서해성 : 이승만이 물러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때 사진, 순종효황후 사진이 남아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포스가 정말 대단하세요. 지금 인터넷 검색하면 바로 나옵니다.

▶ 김종배 : 여장부셨군요.

▷ 서해성 : 대단한 장부십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셨고, 말년에도 정말 당당하게 사셨고, 66년에 일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34**님이 ‘몰랐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보내주셨고요. 95**님은 ‘예장동 2-1은 현재 기억의 터입니다’, 이렇게 또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서울시에서 두 개 달을 만들어놨는데요. 그 기억의 터도 제가 그 장소를 그쪽을 제가 기획해서 했는데요. 그곳이 원래 국치터였다는 말씀을 제가 드리는 것입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은데요.

▷ 서해성 : 벌써 마무리를 해야 되는군요.

▶ 김종배 : 네. 그전에 29**님이 ‘이완용 묘 어디 있어요?’ 막 화가 난 문자를 보내주셨네요.

▷ 서해성 : 이완용 묘는 전라북도에 있었는데, 그 후손들이 파묘를 했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네. 하도 이제 사람들이 찾아오고 이러니까,

▶ 김종배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 서해성 : 그런데 그중에 있었던 명정이라고 그러는데요. 그러니까 관에 썼던 그 글씨는 역사학자 이병도가 가져간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방계 가족, 후손입니다.

▶ 김종배 : 이병도? 그래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당시 원광대학교가 보존하고 있던 것을 찾아간 것으로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정리하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 김종배 : 네. 정리 좀 해 주시죠.

▷ 서해성 : 조약이 체결된 건 8월 22일이었습니다. 29일에 발표가 됐는데, 그 일주일 동안 인사동 북쪽이 지금 현재 돌장승이 서있는 곳에 조선시대 때 충훈부가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뭐죠? 보훈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망치소리가 그치질 않았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훈장을 남발하고 있는 소리였습니다.

▶ 김종배 : 훈장 만드느라고?

▷ 서해성 : 네. 그날 저녁에는, 29일 날 저녁에는 장안에 기생집에 방이 없었습니다. 울고 싶어서 술을 마시러 간 게 아니라 훈장을 받는 축하잔치 때문이었습니다. 이자들을 용서해야 한다면 이 나라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요.

▷ 서해성 : 정말 제가 말이 안 나와서 한 가지만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해 한국인들이 세상을 둘러보니까 이상한 꽃이 많이 핀 겁니다. 그래서 그 꽃, 본 적이 없는 꽃이었는데, 미국에서 건너온 꽃이었습니다.

▶ 김종배 : 어떤 꽃인데요?

▷ 서해성 : 노란 꽃입니다. 흔히 계란꽃이라고 부르는 꽃인데, 나라가 망하던 해에 많이 핀 꽃이라고 해서 그 꽃 이름을 망국초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걸 줄여서 망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망초 혹은 개망초,

▶ 김종배 : 개망초.

▷ 서해성 : 네. 망초라고 부르고 있는,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지식인, 부자, 잘난 놈들은 나라를 팔아먹을 때 조선의 국민, 민중 혹은 백성은, 순종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민중들은 그 꽃에 이름을 붙이고 영원히 나라가 망했던 일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식물에 이름을 붙이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 기억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어서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그렇게 마무리하면서 또 오늘 박학다설은 아쉽지만 이렇게 정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지금 46**님은 ‘라디오를 들으면서 눈물이 솟구치네요’ 이렇게 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우리 국치일은 기억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 서해성 : 네. 이 말씀만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이제 국치가 없으니까요. 국치보다 부끄러운 일은 국치를 잊는 일입니다.

▶ 김종배 : 맞아요.

▷ 서해성 : 기억의 국치, 기억의 국치가 더 비참한 것이죠. 8월 29일도 함께 기억해주십사 하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 김종배 : 8월 29일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서해성 작가였습니다. 수고하셨어요.

▷ 서해성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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