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 [서해성의 박학다설] ‘10000 대 0, 우금치 학살’

김새봄

tbs3@naver.com

2017-12-0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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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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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서해성의 박학다설] ‘10000 대 0, 우금치 학살’


    ● 방송 : 2017. 12. 1. (금)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 김종배 : 우리 시대의 지식광대죠.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서해성 :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한 주 잘 보내셨고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오늘은 어떤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서해성 : 오늘은 우금치전투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부르고 동학혁명이라고도 부르는,

    ▷ 서해성 : 네. 수많은 여러 가지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 김종배 : 거기서 통한의,

    ▷ 서해성 : 네. 통한의, 통한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 역사의 거대한 분수령이 되었던 1894년 12월 5일 얘기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12월 5일이었어요?

    ▷ 서해성 : 네. 양력으로 12월 5일이었습니다.

    ▶ 김종배 : 전투가 벌어진 게,

    ▷ 서해성 : 네. 우금치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전투는 대략 일주일가량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금치 대회전, 우금치에서 있었던, 주전장이 있었던 바로 그곳은 12월 5일 아침 해가 떠서부터 해가 졌을 때까지, 그때는 거의 야간전투는 없었습니다. 지금 같은 야간전투는 없었습니다. 야간전투는 근대적인 전술의 하나입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사극 보면 전부 다 야간전투던데,

    ▷ 서해성 : 그거는 몇몇 유격부대들의 활동을 과장해서.. 드라마니까요.

    ▶ 김종배 : 드라마인데 제작비 줄이려고, 스케일을 있어 보이는데 하려면 야간이 맞는 거지.

    ▷ 서해성 : 야간도 맞고, 또 사람들이 볼 때도 야간에는 소부대 활동밖에 할 수 없는데 대부대가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6.25영화 같은 것. 저는 전투장면을 잘 안 보는데요. 이유가 뭐냐면 집단으로 움직이는 게 보이거든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근대전투에서는. 연사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군대에 가면 각개전투라는 걸 배우게 되는데,

    ▶ 김종배 : 연사무기라는 게 ‘따다다다다’ 기관총 같은,

    ▷ 서해성 : 네. 그런 밀집대형은 전투를 하지 않고 그냥 죽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 김종배 : 그러네. 그러니까 근대 이전에는 그럼 야간전투라는 건 거의 없었다.

    ▷ 서해성 : 네. 있다 하더라도 화공이라든지 이런 정도의 것들이었고 그리고 전투대형은 근대 이전에는 밀집대형이었습니다. 연사무기가 없었기 때문에요. 그렇지 않으면 화살의 위력 같은 것들이 산개되면 아주 효과가 낮아지기 때문에 밀집해서 했던 겁니다. 바로 그 시대 때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군대행군입니다. 중세방식의 행군을 하고 있다. 그렇게 보여줘야 되니까요. 오와 열을 맞춰서,

    ▶ 김종배 : 말 그대로 위세를 보여주는,

    ▷ 서해성 : 위세를 보여주는 그 방식인데 그런 좋은 얘기를 할 날은 오늘은 아닌 것 같고요. 12월 5일이 이제 머지않았는데 바로 그 우금치에서 동학군 1만 명이 그날 전투에 참가했고요. 대략 최종전투가 끝났을 때는 500명 정도가 살아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면 9,500명이 죽었습니까?

    ▷ 서해성 : 그날 지금처럼 편제가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군이라는 게 군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어제까지 괭이 잡던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분들이 전봉준의 공초, 요즘말로 하면 법정기록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수사기록에, 그러니까 만 명을 같이 참가했다. 1차 전투가 끝나고 점고, 숫자를 세워보니 3천 정도가 남아있었고 2차 전투가 끝났을 적에는 500여명 정도가 남아있었다는 전봉준의 구체적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대략 만 명 정도가, 여기서 동학군이 만 명만 있었다는 뜻이 아니고 주변전투를 빼고 우금치에서 있었던 당일 주력전투를 벌였던 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 전투에 대략 남은 사람이 나중에 되니까 500명 정도 남았더라,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근현대사, 그 당시 외쳤던 게 ‘척양척왜’, 서양을 반대하고 왜인들을 척결하겠다는 슬로건으로 나섰던 근대자주화투쟁 그 곡예가 바로 우금치, 공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 얘기를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 김종배 : 그렇죠. 아까 통한이라는 표현을 쓴 게 바로 그 우금치만 넘었더라면, 그래서 거기서 이겼더라면, 하는 가정을 많이 하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제가 왜 이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냐면 세 가지 정도 측면이 있는데요. 우리는 일본군하고 한국군이 그냥 싸운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우금치전투라고 이건 하나의 꼭짓점을 얘기하는 것이고요. 사실은 그 당시에 청일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건 러시아였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그래서 왜 우금치 아래쪽으로 병사들을 몰아서 호남 일대의 해양 지방으로 몰아서 나중에 최종적으로 수만 명을 학살하게 되는 이유도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서, 왜냐하면 우리나라, 가령 동학군들이 계속 북쪽으로 가게 되면, 북쪽 두만강을 넘게 되면 거기가 러시아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러시아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에 동북쪽에서부터 계속 서남쪽으로 압박을 가하는, 그런 형태로 일본군이 전투를 전개했던 것이고요. 그리고 또 하나 외곽에는 일본을 엄호하고 있었던 건 당시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이 뒤에서 배후를 하고 있었고요. 그래서 실은 거대한 국제전이었다는 말씀을 제가 드리는 것이고요.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싸운 일인데 그 배후는 알다시피 또 하나가 중요한 축이 청나라지 않습니까? 우리가 청나라가 반백년 전에 망했기 때문에 굉장히 얕잡아보는데 사실은 청나라가 건륭제, 이럴 때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은본위제도, 화폐제도에서 당시 세계 은의 70%가 청나라에 있었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대단한 위세를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고요. 오늘날 우리가 은행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청나라 시대 때 생겼는데요. 바로 은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 김종배 : ‘은행’이라는 말이 청나라 때 생겼어요?

    ▷ 서해성 : 네. 은이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곳, 그러니까 얼마나 컸으면 그런 말이 생겼겠습니까? 방크, 영어로 뱅크 그러는데 그건 서양에서 나온 말이고요. 아시아에서는 은행이라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얼마나 부자였으면 그런 말이 나왔겠어요. 그 청나라가 무너지게 되는 결정타가 이제 청일전쟁이었는데 바로 그 청일전쟁의 한 축이 동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직접적으로 동학군을 학살해야겠다고 일본군이 결정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우리 동학도군들이, 동학농민군이죠. 동학농민군들이 부산에서부터 한성, 서울까지 일본인들이 전투를 위해 전선을 깔아놨었습니다. 전화선을 깔아놨는데 유격전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인데 중간에 전화선을 끊거나 전봇대를 자르는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 같은데 그 당시에는 전화선이 거의 단선이었기 때문에 그게 선이 끊어지게 되면 일본과 본국과 연결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었습니다.

    ▶ 김종배 : 아니. 전쟁 중에 제일 중요한 게 병참선하고 통신선인데,

    ▷ 서해성 : 네. 병참, 통신선을 끊었던 겁니다. 동학군들이 후방지역에서, 그러니까 청나라로 봤을 적에는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이가 조금 드신 분들 기억이 나실 텐데 어린 시절에 왜 그 전봇대에 돌 던지는 그런 일들이 있었거든요.

    ▶ 김종배 : 저도 했어요, 어릴 때.

    ▷ 서해성 : 그러니까요. 그게 사실은 동학 때 시작된 것입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난데없이 생긴 게 아니고 그게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하는, 전화선 연결된 부분을 절연체를 사용해야 되기 때문에 그걸 애자라고 그러는데, 애자를 돌로 던져서 깨뜨리게 되면 거기에 단락이 일어나서,

    ▶ 김종배 : 사기로 되어 있죠, 아마. 애자가,

    ▷ 서해성 : 네. 사기로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94년 우리 동학농민군의 일종의 게릴라전술로 시작되었다 하는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렇군요.

    ▷ 서해성 : 그러니까 그게 수십 년 동안 이어졌던 것이고요. 어렸을 적에도, 그때 동학군들만 한 게 아니라 기록에 보면 어린 아이들 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김종배 : 저도 어릴 때 했는데 애자는 감히 못 던지고 저 뒤에 가서 전봇대 기둥, 기둥 맞추는, 일본은 생각도 못했고, 누가 잘 던지나,

    ▷ 서해성 : 그런데 그 문화가 완전히 없어졌지 않습니까? 그게 한국이 이런 기물들이 한국 것이라고 하는 인식이 한국사람들한테 자리 잡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걸 침략의 물건으로 간주했고 지금은 공공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 과정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의 결정적인 순간이 바로 우금치다, 하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아까 말씀하시면서 우금치전투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이 만 명이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500명만 남았다. 거의 전멸수준이지 않습니까?

    ▷ 서해성 : 그걸 전멸이라고 하는 거죠.

    ▶ 김종배 : 그러니까요. 그럼 이 전투가 어떻게 진행이 되었던 겁니까?

    ▷ 서해성 : 전투는 당일 날, 얘기하기 전에 조금만 먼저 말씀을 드리면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게 1894년 5월 31일입니다.

    ▶ 김종배 : 전주성,

    ▷ 서해성 : 네. 그런데 바로 사실은 동학군이 위세를 발휘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철수를 합니다.

    ▶ 김종배 : 왜요?

    ▷ 서해성 : 바로 그것이 중요한 말입니다. 전주화약을 6월 10일 날 체결합니다. 그러니까 10일밖에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때 우리가 임오군란 때처럼 그 원칙에 따라 똑같이 청나라에게 원병을 청했기 때문입니다. 고종이 긴급어전회의를 열었고 ‘임오군란 때처럼’이라고 했습니다. 임오년의 그 원칙에 따라서 청군에게 원병을 한다, 이렇게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동학군들이 당시에 봤을 때 그건 자동적으로 제물포조약에 의해서, 텐진조약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일본이 함께 들어온 인계철선 개념이었기 때문에 동학군이 봤을 때 우리가 폐정을 개혁하려고 했는데 거꾸로 우리나라를 외세를 끌어들이게 된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동학군이 훨씬 더 외교에 능한 거죠.

    ▶ 김종배 : 그러니까 정리하면 동학군이 들고 일어나니까 고종이 그러면 청군을 불러들여서 너희들을 진압하겠노라, 이렇게 되니까 이러면 외세가 끌어들여지면 안 되니까 우리가 일단 물러나겠다. 이렇게 됐던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게 전주화약의 배후입니다. 그래서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은 일본군하고 청군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돌아가지 않고 그런데 계속 머물렀습니다. 머물렀고, 그러고는 7월 23일 날, 그해 7월 23일 날 지금의 경복궁 서문, 연추문이라고도 하고 써있기는 연추문이라고 써 있는데 영추문이라고 합니다. 영추문이라고 써있는데 읽을 때 연추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은 두 개의 한국사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해 1894년 7월 23일 날 일본군이 그 문을 깨뜨립니다, 새벽 4시에.

    ▶ 김종배 : 그러니까 난입을 했다는 거죠?

    ▷ 서해성 : 난입을 했습니다. 그때 그걸 깨뜨렸던 사람이 요시마사라고 하는 사람인데 일본군 당시 구여단장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냐면 그 사람의 딸의 딸의 손자가 지금 현재 아베신조입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아베하고 우리하고 인연이 참 길죠. 그래서 그 당시 궁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들하고 총격전을 벌입니다. 두 시간이 약간 넘는 총격전을 벌여서 그런 과정에 고종이 체포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고종이 사실상 연금인질 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런데 그러고 나서 청일전쟁이 언제 시작하냐면요. 7월 23일 날 경복궁을 점령하고 그리고는 25일 날, 이틀 뒤에 아산망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기습적으로 청나라 함대에 대해서 발포를 가합니다. 그래서 함대 두 선을 격침시킵니다. 이게 청일전쟁의 시작이고 청일전쟁의 시작은 풍도 앞바다에서 시작했다기보다 경복궁 점령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제 경복궁을 점령하냐면, 만약에라도 한국, 조선이죠, 당시에는. 조선의 군대가 일본 편을 들지 않고 청나라 편을 들 가능성이 많다. 당시 일본들은 청나라 편을 들 것으로 봤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가 청에게 상당히 영향력이 높았기 때문에 그렇게 봤기 때문에 먼저 한국군을 제압한 것입니다. 한국군은 최상층 명령책임자가 고종이지 않습니까? 고종을 연금 상태에 두고 바로 전투를 전개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동학군들에게 그 소식이 전파되었고요. 전봉준은 고심 끝에 ‘일본군하고 전면전으로 맞서는 전쟁을 보여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지금 충청도하고 전라도 경계에 있는 삼례라고 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전주 북쪽입니다.

    ▶ 김종배 : 삼례, 그 유명한 삼례,

    ▷ 서해성 : 삼례에서 대도서를 세우고 충청도, 전라도 사람들을 모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기껏해야 12월 5일이니까 그리고 한 두어 달 총검연습을 했으면 얼마나 했을 것이며, 그렇지 않습니까? 일본군편에서 보면 오합지졸인 것이고요.

    ▶ 김종배 : 총검이 있었겠어? 대창, 이런 거였지.

    ▷ 서해성 : 네. 죽창도 사용했고 총검이 있긴 했습니다만 화승총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학군들이 그 세를 모아서 그런 과정에서 해월 선생, 최시영 선생이 ‘이대로 두면 안 되겠구나’라고 결정을 보고 이른바 ‘동학, 외세하고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동학농민군 총동원령을 내리게 되어서 손병희 선생과 함께 북쪽이 내려오게 되면서,

    ▶ 김종배 : 남접북접,

    ▷ 서해성 : 남접북접이 강경 그리고 논산 일대에서 하나가 어우러져서 이제 북쪽으로 진군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시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일본군 19대대가,

    ▶ 김종배 : 지금 용산 미군기지가 거기 아닙니까?

    ▷ 서해성 : 용산 미군기지가 바로 이때 생긴 것입니다. 용산 미군기지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그보다 조금 일찍 생기기는 했습니다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겼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슬픈 일이죠. 용산 미군기지가 원래는 일본기지였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3개 중대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 이렇게 나뉘는데 무슨 이야기냐면 한반도를 압박하면서 내려갑니다. 지금 생각하면 여러분 생각하실 때 그 까짓것 1개 대대 오는데 뭐 대단했겠느냐? 그렇지 않고 무기체제, 또 군사훈련체제, 이런 것들이 현저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고종에게 압박을 가해서 한국군 당시의 주력 한국군들의 작전권을 일본군이 위임받았습니다.

    ▶ 김종배 : 전시작전통제권을 일본군이 갖고 있었습니까, 그러면?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일입니다.

    ▶ 김종배 : 한국군까지, 관군이죠. 관군,

    ▷ 서해성 : 그 당시에는 관군이라고 했습니다만 조선군, 한국군이 맞죠.

    ▶ 김종배 : 동학농민군하고 구별하기 위해서 그냥 관군이라고 부르면, 관군까지 일본이 관할을 하면서 이들까지 동원했다는 거잖아요.

    ▷ 서해성 :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전권을 일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시작전권이라는 게 어제 오늘 갑자기 빼앗긴 게 아니고 이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빼앗겼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관군은 청일전쟁에도 같이 참여합니다. 왜냐하면 전시작전권이 일본군으로 넘어가있었기 때문에, 요즘 표현으로 하면 전시작전권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넘어가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전투 때도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관군의 상당수들이 청나라하고 벌인 평양전투에 참가합니다. 우리 역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날이 논산에서부터 출발해서 계속 올라오는 과정 속에서 동학군이 대소전투를 벌이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전봉준은, 대부분의 전투는 패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공주를 점령해야겠다. 전봉준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은 군사적 지식이나 능력보다는 민심이었죠. 민심과 함께 하면 이 전투를 믿을 수 있다고 믿고 전진했던 것인데 그런데 전쟁은 그렇지, 인간적인 것들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었죠.

    ▶ 김종배 : 아무리 의기와 사기가 있다 하더라도 군수물자나 군 체계에서 밀리면 게임이 안 되는 것이죠.

    ▷ 서해성 : 그렇죠. 그렇게 해서 마침내 12월 5일이 온 것이죠. 그날 아침에 진눈깨비가 내렸습니다.

    ▶ 김종배 : 아, 그래요?

    ▷ 서해성 : 네. 그리고 점심이 되었을 적에는 비가 바뀌었습니다.

    ▶ 김종배 : 날씨가 정말로 추적추적한 날씨였구먼

    ▷ 서해성 : 그런데 그때 우리 병사들은 화승총을 사용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면 불발도 되게 많았겠는데요.

    ▷ 서해성 : 화승총은 쏠 수가 없는 거죠. 불씨에 불을 붙이면 불씨에 불이 붙질 않는 거죠.

    ▶ 김종배 : 그러니까요. 점화를 못하는 거죠.

    ▷ 서해성 : 점화를 못하는 거죠. 단발총이었고요. 가장 뛰어난 사수가 1분에 2발을 쏠 수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1분에?

    ▷ 서해성 : 네. 그리고 이건 반드시 밀집대형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화승총은 조준사격이 어렵기 때문에 밀집해서 쏴야만 그 일대에 탄환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건 서서쏠 수 밖에 없습니다.

    ▶ 김종배 : 화승총을요? 왜요?

    ▷ 서해성 : 왜 그러냐면 화승총은 엎드려 쏘기가 불가능합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조건하에서 각개전투가 불가능하죠. 그런데 일본군과 관군은 다 엎드려쏘는 거였고 그리고 교대로 쏘거든요. 제1열이 쏘면 제2열이 그다음 쏘고 그다음 뒤로 가서 장전하면, 연사했죠. 일본군이 사용했던 것도 물론 스나이더라고 하는 단발소총이었습니다. 그러긴 했습니다만 단발소총 성격이 달랐습니다. 이건 탄환만 바꾸면 되는 거지만 우리는 화승을 바꾸고 앞에 총알을, 전장식, 그러니까 총구 앞쪽에 화약을 눌러서 장전해야 되는 형태였습니다.

    ▶ 김종배 : 말이 우금치전투였지만 사실상 일방적인 거였다고 봐야 되는 거잖아요.

    ▷ 서해성 : 우금치는 학살이었습니다.

    ▶ 김종배 : 학살이다?

    ▷ 서해성 :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었는데 농민군들은 무장을 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화승총과 당시에 일본군이 가지고 있었던 무기 재원이 현재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대략 독일제 쿠르프 야포를 사용했습니다.

    ▶ 김종배 : 야포까지 등장을 해요?

    ▷ 서해성 : 네. 야포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개틀링이라고 하는 기관총을 사용했습니다.

    ▶ 김종배 : 그 유명한,

    ▷ 서해성 : 미국에서 개발한 손으로 돌리는, 개틀링 기관총을 사용했고요. 그런데 그 당시 그걸 포라고 불렀습니다. 회선포라고 불렀습니다. 회전한다는 겁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여기서 봐, 그날 비까지 내리니까 화승총은 쏠 수가 없어.

    ▷ 서해성 : 가끔은 쐈겠지만 잘 안 나가는 거죠.

    ▶ 김종배 : 그러면 예를 들어서 멀리 떨어져서 우리 편을 보유를 하면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고, 그 다음부터는 죽창이나 칼이었을 테니까 그러면 결국 근접전을 해야 되는데 이건 안 되는 거고,

    ▷ 서해성 : 근접전을 일본은 피했죠, 회피했죠. 할 이유가 없죠.

    ▶ 김종배 : 그러니까요. 일방적으로 말 그대로 도륙 당했다, 학살당했다.

    ▷ 서해성 : 이렇게 보시면 되거든요. 우금치가 현재 가로 폭이 800m고요. 세로 폭이 1200m입니다. 그 말은 무슨 얘기냐면 가장 먼 거리가 1200m라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런데 1200m보다 더 안쪽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금치가 간단하게 말하면 소쿠리 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남쪽만 열려있고 양쪽이 다 막혀있는 형태의 구조입니다. 동학군은 그 계곡 안에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거기서 말 그대로 그냥 연사,

    ▷ 서해성 : 도륙을 당한 거죠.

    ▶ 김종배 : 도륙을 당한 거네, 한 마디로.

    ▷ 서해성 : 그런 과정에서 전봉준이 이른바 과거에 했던 방식인데 인간파도공격, 제파공격이라고 합니다. 그건 집단형을 이루어야만 가능합니다. 밀집집단대형을 취하면서 제파공격을 동학군, 진압군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40에서 50차례 정도 제파공격을 감행했다.

    ▶ 김종배 : 그런데 기관총 앞에서 그게 됩니까?

    ▷ 서해성 : 총알받이인 거죠. 말 그대로 총알받이인 거죠. 총알받이여도 이런 총알받이는 역사상 없었던 것이죠.

    ▶ 김종배 : 정말로 우금치전투가 아니라 우금치학살이네요, 학살.

    ▷ 서해성 : 네. 제가 말씀을 드리자면 그 전투가 끝나고 일본이 기록을 남겨놓은 게 있습니다. 남겨놨는데 그 기록에 우리는 만 명이 죽었지 않습니까? 일본군은 몇 명이 죽었을 것 같습니까?

    ▶ 김종배 : 몇 명이 죽었는데요?

    ▷ 서해성 : ‘0’명이 죽었습니다.

    ▶ 김종배 :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까?

    ▷ 서해성 : 단 한 명도 죽이지 못 했습니다.

    ▶ 김종배 : 아니.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 게 저 멀리 떨어져서 총 쏘고 기관총 쏘아대는데 근접을 해야, 농민군이 근접을 해야 한 명이라도 죽이죠. 근접도 안됐던 거잖아요, 간단히 이야기하면.

    ▷ 서해성 : 가장 멀리, 전투 중심에 가장 깊이 도달했던 사람은 우금치고개 정상 150m까지 도달했습니다.

    ▶ 김종배 : 150m까지,

    ▷ 서해성 : 150m를 남겨놓고 못 갔다는 겁니다.

    ▶ 김종배 : 접근했던 게,

    ▷ 서해성 : 네. 그런데 우리 화승총 거리가 100m가 안 됩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0명인 게 이해가 되죠. 말 그대로 이건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었지.

    ▷ 서해성 : 일본군은 1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우리 화승총, 어떤 이름 없는, 이름은 안 남았으니까, 쐈는데 그게 나무에 맞고 굴절된 유탄이 일본병사 한 사람의 발뒤꿈치를 맞았습니다.

    ▶ 김종배 : 그래서 부상?

    ▷ 서해성 : 네. 부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 김종배 : 그게 유일한,

    ▷ 서해성 : 유일한 부상을 입은 경우입니다.

    ▶ 김종배 : 이거 참.. 이걸 어떻게 정리를 해야 되는 겁니까?

    ▷ 서해성 : 그러니까 12월 5일을 저는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2월 5일 우리가 그날 있었던 건 거대한 학살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보다 한해 전에 사실은 이게 인류사상 최초로 이런 ‘머신 건(machine gun)’, 연사무기에 의해서, 그전에는 집단학살이 없었습니다.

    ▶ 김종배 : 세계적으로요?

    ▷ 서해성 : 집단학살이 불가능하죠, 칼로 죽여야 되는데.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그렇게 죽이려면 몇 개월을 죽여야 합니다. 말하자면요.

    ▶ 김종배 : 물리적으로 그렇죠.

    ▷ 서해성 : 연사무기가 있게 되면 그 집단학살이랑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 김종배 : 예를 들어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그건 배를 침몰시키는 거고,

    ▷ 서해성 : 배가 가라앉는 거죠.

    ▶ 김종배 : 배를 침몰을 시키는 거고, 이거는 육상에서 하면서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거의 도륙을 하는 경우, 예를 들어서 수공을 해서 둑을 쌓았다가, 그런 것 빼고, 말 그대로,

    ▷ 서해성 : 인간이 얼굴과 얼굴을 대놓고 할 수 있는 학살은 연사무기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 김종배 : 그러면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네요. 연사무기, 그러니까 기관총 같은, 연발이 되는 어떤 총기를 가지고 집단학살을 한 세계사에서 최초의 사례가 그럼 우금치전투다. 이렇게 보면 되는 겁니까?

    ▷ 서해성 : 사실상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보다 한 해 전에 1893년도 10월 25일 날 지금의 진바부에에서 영국의 제국주의자 세실로즈가,

    ▶ 김종배 : 그 유명한 세실 로즈,

    ▷ 서해성 : 세실 로즈가 집단으로 죽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우리보다는 덜 합니다. 왜냐하면 1차 전투 때 그 당시 거기 있었던 종족을 마테벨레 종족이라고 하는데요. 마테벨레 종족이 2천여 명 정도가 죽었고요. 물론 기관총으로 죽었습니다, 그들도. 그리고 그날, 영국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당시 브리티쉬 사우스아프리카 컴퍼니기 때문에 영국남아프리카회사, 이렇게 말해야 되겠죠. 회사군인,

    ▶ 김종배 : 동인도회사 비슷한,

    ▷ 서해성 : 여러분 이해를 잘 못하실 수 있는데 제국주의 시대 때는 회사군인이 많았습니다. 회사군인들이 죽었는데 4명 죽었습니다. 우리보다는 훨씬 더 전공이 높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요. 역사적으로는 그게 마테벨레가 기관총으로 가장 먼저 집단학살이 일어난 사건이고요. 그때 그 전투에서는 숫자가 똑같습니다. 한 만 명 정도 죽었습니다, 마테벨레 종족이. 그러니까 여러분, 아프리카가 그냥 식민지 됐다, 야만인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엄청난 저항을 벌인 겁니다. 종합적으로 마테벨레 전투는 1차, 2차, 3차까지 나뉘는 사람도 있는데 대개 2차까지 나누는데 대개 5만 명 정도의 아프리카에 있는 마테벨레 종족들이 쓰러져가면서 식민지화된 것이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그런데 1차 전투에서 만 명 정도 죽었는데 영국회사군인들이라고 그냥 하겠습니다. 회사군인들은 대략 100명 정도 죽었습니다. 우리에 비하면,

    ▶ 김종배 : 거기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전투는 있었던 거잖아요.

    ▷ 서해성 : 네. 전투는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우금치 같은 경우는 전투가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학살이었던 거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아까 제가 처음에,

    ▷ 서해성 :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이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참패였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학살이었다고 하고 싶은 거고요. 사실은 이 일을 잊지 않아야 되는 게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 김종배 : 잠깐만, 여기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그러면 일본군이 압도적 전력의 우세를 가지고 예를 들어서 일부를 그렇게 한 다음에 항복을 권한다든지, 동민군한테. 이런 절차도 없었던 거죠?

    ▷ 서해성 : 전혀 없었습니다.

    ▶ 김종배 : 그냥 일방적으로 다 쏴 죽인 거죠?

    ▷ 서해성 : 아니요. 그날 밤에도 추격을 했죠. 그날 전투가 끝나고 밤에 눈이 내렸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형세가 이러니까 ‘당신들 싸워봤자 소용없으니 항복해라’ 우리가 흔히 보는 장면이 그런 거잖아요. 항복권유도 없었다는 거잖아요.

    ▷ 서해성 : 없었죠.

    ▶ 김종배 : 그게 무슨 전투에요, 학살이지.

    ▷ 서해성 : 제가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바로 우금치전투의 패배가 조선왕조의 패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력이, 지휘권은 일본이 가지고 있었고요. 그 주력이 관군이었다는 점입니다.

    ▶ 김종배 : 그 학살에 관군도 포함되어 있었던 거고요.

    ▷ 서해성 : 관군이 다수였죠.

    ▶ 김종배 : 앞서 제가 우금치를 말씀해 주신다고 해서 통한의 우금치전투다. 왜냐하면 여기서만 이겼더라면 당시 형세가 달라졌을 것이다. 제가 옛날에 동학혁명 관련 책을 보면서 그렇게 읽었고 그랬는데 이길 수가 없었던, 애당초, 그런 거잖아요.

    ▷ 서해성 : 네. 그래서 저는 꼭 거기에 사실은 학살에 대한 어떤 메모리얼 같은 것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 위령탑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사실 위령이라는 말 자체가 그전에 그런 말은 있었습니다만 이런 식의 개념을 쓴 건 일본인들이 한국을 침략하고 처음 사용하는 것입니다.

    ▶ 김종배 : 그렇습니까? 위령이라는 말이?

    ▷ 서해성 : 네. 그래서 그런 말도 그렇고 그 비를 세운 사람이 이선근이라고 하는 친일파입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박정희 밑에서 했던 사람인데,

    ▶ 김종배 : 친일파가 위령탑을 왜 세웁니까?

    ▷ 서해성 :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조금씩 하지 않습니까?

    ▶ 김종배 : 박정희 정권 시절에,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비도 위치가 잘못된 게 북쪽에 있습니다. 전투는 남쪽에서 있었는데, 그리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위로하는 말씀이랄까요, 한 가지만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다. 우금치 전투 12월 5일이 있고 12월 10일 날 밤이었습니다. 이름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는 동학군 한 명이 지금은 연산, 충남 연산에 야간매복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근거리에서 총알 한 발을 발사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 한 명이 죽었습니다. 동학군 전체를 통해서 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기록은 한 명, 어떤 기록은 두 명이 전사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제가 찾아본 기록으로는 동학농민군 전체를 진압하는 과정 속에서 죽은 일본군은 한 명입니다. 그 사람 이름이 전하고 있는데 스기노 도라우치라고 하는 사람인데 38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 빼놓고는 일본군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제가 살상이 좋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침략군이 왔을 적에 그 당시,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수많은 세력들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침략자와 맞서서 일어났던 유일한 세력이 동학농민군이었다는 겁니다. 관군은 당시 일본군 지휘 아래서 바로 이렇게 나라를 지키겠다 했던 그 사람들을 학살하고 진압했습니다.

    ▶ 김종배 : 바로 여긴데요. 이 이야기는 한 번 더 가야 될 것 같습니다.

    ▷ 서해성 : 네. 그렇게 하시죠.

    ▶ 김종배 : 여기서 일단 마무리를 해야 되는데 우금치전투가 아니라 우금치학살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학살의 주역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관군이 또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상기를 하면서, 그런데 이것이 갖는 의미는 사실은 다음 주에 조금 더 자세하게 진단을 해야 될 것 같고요.

    ▷ 서해성 : 다른 것보다도 12월 5일이 바로 내일모레인데 12월 5일 날 우금치는 가지 않으시더라도 한 번쯤 그때 돌아가셨던 분들 생각해 주십사 하는 뜻을 가지고 오늘 방송을 해봤습니다.

    ▶ 김종배 : 바로 그날 만 명이 학살을 당했다는 사실만 일단 우리 기억을 하고요. 다음 주를 기약하도록 하죠. 서해성 작가와 함께 했는데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해성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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