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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 서해성“전두환, 87년 6월 19일 군에 동원 지휘 명령 내려놨다”
이민정
adorablejung@naver.com
2017-06-09 22:42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7. 6. 9. (금) 18:00~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서해성 “전두환, 87년 6월 19일 군에 동원 지휘 명령 내려놨다”
▶ 김종배 : 우리 시대의 지식 광대입니다. 서해성 작가와 함께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 서해성 : 네.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앞서 저희가 2부에서 30년 전 그날 명동성당 이야기를 쭉 나눠봤는데요. 우리 서해성 작가님하고 87년 6월 항쟁, 6월 민주화 운동 공식 명칭은 그렇게 되어 있죠. 이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것 같은데 이 질문부터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 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 서해성 : 그 날 저도 마찬가지로 시청 근처, 명동성당 근처 그 일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저는 쫓겨나서 청계천, 지금 없어진 청계 고가도로 위로 도망을 갔거든요.
▶ 김종배 : 고가로 가셨어요?
▷ 서해성 : 네, 왜냐면 거기 가면 안전할 줄 알고 차량이 그 때 다 안 다니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올라갔더니 전경이 그 위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뛰어서 내려오다가 또 밑에 또 전경이 있어서 할 수 없이 중간에 밑으로 뛰어 내렸는데 그 때 약간 발목을 다쳤죠.
▶ 김종배 : 다리 괜찮으셨어요?
▷ 서해성 : 근데 그 때는 몰랐어요. 하도 마음이 다급하고 그리고 한 30분 지난 뒤에 왼쪽 다리가 몹시 아프다는 걸 (웃음)
▶ 김종배 : (웃음) 좀 둔하셨군요.
▷ 서해성 : 아니 저만 그랬던 건 아니고요. 그 때 여학생도 뛰어 내렸거든요. 그러니깐 아마 저만 그렇게 절뚝거리면서 도망간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그랬는데 아마 그 순간에 거의 못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신문에 보니깐 그 위로 끝까지 도망간 친구들은 다 잡혔다고..
▶ 김종배 : 알겠습니다. 그 날의 의미, 그 날의 기억 우리 애청자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계속 문자 주시고 계시는데 자신을 87학번이라고 소개를 해 주시면서 ‘이대 전철역에서 학교 정문 가는 길에 전교생이 드러누웠었어요. 학교 안 광장까지요. 1학년 때였죠. 답답했어요’ 라고 문자를 주셨습니다.
▷ 서해성 : 기억납니다.
▶ 김종배 : 왜 답답하셨을까?
▷ 서해성 : 그 상황이 답답했다는 거죠.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답답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권력과 싸워야 한다는 우리가 싸울 상대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적장의 목을 베면서도 네 몸을 베기 참 아깝구나, 이런 적하고 하거든요. 수준 있는 적과 싸워야 되는데(웃음) 너무 야만적인 적하고 싸운다는 자체가 너무 답답한 거죠. 너무 상식 이하였으니깐 모든 게요.
▶ 김종배 : 또 다른 분은 ‘그 날 명동성당 주변을 에워 싼 백골부대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도로마다 사람물결 여기저기 그리고 터지는 최루탄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주셨고 카카오톡으로 또 문자를 주셨는데요. ‘역사의 주역은 언제나 평범한 시민들입니다.’ 바로 이게 정답이죠, 사실.
▷ 서해성 : 정말 제가 몇 십 년 만에 얘기하는데요. 그럴 때 사수대 일을 제가 하고 선전 일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개인적인 얘길 하는 순간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두렵습니다, 백골단을 보면. 두려움을 어떻게 분노로 바꾸는가가 시위 전문가를 가르는 기점인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네, 6월 민주항쟁 벌써 30주년입니다. 어떻게 기억하고 계세요?
▷ 서해성 : 시민의 힘이라는 게 대단한 걸 정말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우리 헌정 체제 시작한지 지금 대략 70년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30년 동안 헌법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 김종배 : 아, 그렇네요. 제일 긴 헌법 체제이네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헌법은 사실상 3개만 진짜 헌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헌 헌법이고 두 번째는 4.19에 의해서 만들어진 4월 헌법 그리고 6월 헌법이죠. 이게 지금 6월 헌법이지 않습니까? 헌법은 실제로 발효된 건 12월입니다만 6월 헌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헌법들은 다 대통령들이 자기 취향에 맞게끔 권력의 성질을 바꾸려고 개헌을 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개헌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요. 진정 우리나라 공화국이 3번 정도 있었다. 실질적인 헌법적 가치로는 당연히 우리가 6공화국에 살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다, 그런 점에서 시민이 다수들이 나서서 만들었던 이 6월 헌법이야말로 진정한 헌법으로 30년 동안 그 가치를 유지하고 있고 지금까지 오늘날 우리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그런 힘의 근거가 6월 시민항쟁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그리고 80년대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 갈 수가 없는데요. 80년대 이걸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합니까?
▷ 서해성 : 80년대는 역사적으로 여러 개로 정리를 합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 제가 한 마디로 규정을 하면 이건 장기 5월이었다, 이렇게 규정할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장기 5월?
▷ 서해성 : 네, 제 주장이 아니고요. 87년에 한국에 오셨던 세계적인 역사학자인데요. 에릭 홉스봄이라는 역사학자입니다. 이 분이 돌아가셨을 때 영국 가디언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신문이 1면에 부고 기사를 냈는데 그 때 그 1면 헤드라인 기자가 이거였습니다. ‘Historian’s Historian’ 역사학자의 역사학자. 그러니깐 역사학자한테 줄 수 있는 최고의 상찬을 이 분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19세기를 설명하면서 서양에서는 서구에서는 19세기 전체가 장기 19세기였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그 안에 엄청난 변동이 있었단 겁니다. 그런데 하나의 가치로 유지되었단 거죠. 일정하게 변동이 있으면서도 하나의 줄기 이른바 혁명의 시대라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근데 한국에서는 정말 혁명의 시대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이 80년 5월 18일 광주항쟁에서부터 6월 항쟁까지 이어지는 것이었고 6월 항쟁까지 지속적인 항쟁이 7년 동안 가능했던 핵심적인 이유에 그 기저에는 사실은 광주학살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죄의식 그리고 그렇게 학살을 자행했던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대해서 용서할 수 없고 관용할 수 없다 하는 것에 대한 확고한 대중들의 동의, 이런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87년까지 전체를 긴 5월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 김종배 : 그렇죠. 여기에 토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애청자 여러분들이 계속 문자 주시고 계시는데요. 또 한 분의 애청자께서 이런 문자를 주셨습니다. ‘그 때 백골 부대 일원이었습니다. 우리도 힘들었어요’ 이렇게 보내셨네요.
▷ 서해성 : 저 말씀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전경들은 차출됐습니다. 네, 차출되었고 좀 신체 건강해 보이고 가면 물어보거든요. 태권도 학원 다닌 사람 손들어, (웃음)그럼 그게 백골단에 뽑힌다는 걸 모르고 손을 들죠. 유도 학원 다닌 사람 손 들어. 손 들죠. 자기 체력을 위해서 한 것인데 그런 사람들 백골단에 뽑혀 나가고 물론 자원자도 많았습니다만 근데 제가 실제로, 나중에 얘기하려고 그랬습니다만 그 백골단이나 전경들을 가까이서 근거리 5미터 그보다 훨씬 더 가까이 사실 1미터 이내로 가까이 가서 가드 투쟁을 벌여본 적 있습니다. 그 때 방독면 속에서...
▶ 김종배 : (웃음) 오늘 전문용어 너무 많이 쓰시네요.
▷ 서해성 : 제가 얼결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 방독면에 흐르는 땀 말고 눈물을 흘리는 걸 제가 진짜로 보았습니다.
▶ 김종배 : 아, 그래요?
▷ 서해성 : 네, 봤습니다. 그러니깐 그 때 그 백골단이나 전경단이 힘들었다는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백골단이라고 하는 것은 전두환 파시스트에 대한 방어자일 수밖에 없었고 학생들에게는 시민들에게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백골단이 그 당시에 저질렀던 여러 가지 패악들 나중에 그것은 87년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91년도 사태로 이어졌던 강경대 학생 타살할 때도 이미 담을 넘어 간 학생을 붙잡아서 뒤통수를 때려서 현장에서 절명케 했던 그런 일들로 보았을 때 그 부분에 대한 성찰은 백골단 출신들은 사실 깊이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6월 항쟁하면 첫 시작일은 물론 6월 10일이었습니다만 이게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날이 아니고 전사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어디서부터 이걸 더듬어서 되살펴야 할까요?
▷ 서해성 : 가장 멀리 잡으면 사실은 유신체제부터 잡아야겠죠.
▶ 김종배 : 너무 멀리...
▷ 서해성 : 그렇죠. 너무 멀리 가는 것이고 그리고 광주 항쟁 얘기할 수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그보다는 86년도에 그 5.3인천사태라는 게 있었지 않습니까? 5.3인천항쟁 이렇게도 부르고 그런데...
▶ 김종배 : 86년이었죠.
▷ 서해성 : 네, 86년도에 신한민주당이 개헌추진본부 현판식을 하는데 사람들이 그 당시에 거기 많이 모였습니다. 그 신한민주당을 지지해서만이 아니라 집회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야당이 그 현판식을 하면 우리도 현판식 한다는 핑계로 몇 만 명씩 모였거든요. 대구에서는 10만 명이 모였거든요. 그 당시에. 그런 걸 한다고 하니깐요. 그런 과정에서 인천에서 큰 집회가 있었고요. 그리고 정말 사람들이 분노했던 것 중 하나는 부천서에서.
▶ 김종배 : 성고문 사건
▷ 서해성 : 네, 성고문 사건. 일하고 있었던, 어떤 이름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 분이 나이가 드시고 그랬을 테니깐 서울대 여학생이 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수갑이 뒤로 채워진 채로 성희롱과 성추행으로 사실상 그런 일을 했던 것이었죠. 그런 것들이 누적되어 있었고 결정타는 사실은 그 해 있었던 1월 14일에 있었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었던 박종철 학생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끝에 사망케 했던 그 사건이 87년도 1월 14일에 있었고요.
▶ 김종배 : 딱 쳤더니 억 하고 죽었다. 말도 안 되는...
▷ 서해성 : 그 고문 학생이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얘기를 했던 거죠. 그리고 그 해 4월 13일 전두환 씨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호헌조치, 헌법을 지키겠다는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이고요. 그 당시에 왜 그랬냐면 사실상 우리 헌정 질서에서 주권자가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한 그런 상황이었는데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있는 것을 호헌조치를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 호헌조치에 따라서 6월 10일 민정당, 이 말도 꼭 하고 싶습니다. 전두환이 만든 정당 이름이 민정당이었습니다. 이 말은 정식 명칭이 민주정의당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그리고 불의의 정권이, 민주와 정의를 훔쳐간 일이었죠. 대표적으로요. 정말 모욕적인 이름이죠. 그런데 하여튼 민주정의당이 제4차 전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그런 행사를 6월 10일날 그 당시에 잠실체육관에서...
▶ 김종배 : 바로 그 날이 대선후보 선출날이었어요.
▷ 서해성 : 선출날이었습니다.
▶ 김종배 : 노태우 후보가 선출된 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 전날 대개 과거를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 설명을 드리면 대개 큰 집회를 하기 전날 전야제라는 걸 합니다. 내지는 출정식을 먼저 하루 전에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대개 학생회관 같은 데 잠을 자고 그 다음날 시위를 나가는데 그 전날이 바로 6월 9일이죠. 그 때 연세인들 이제 출정식을 거행하고 백양로 끝에 전경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시위, 예비시위라고 말을 하죠. 사실은요. 6월 10일날이 본격적인 시위고 그걸 하러 갔던 학생 중 한명이 이한열이라는 학생이었죠. 그 나가서 그 아까 방송에서 차마 얘기를 못하신다고 했던 집중적으로 이제 쏘는 페퍼포그와 그 최루탄을 발생했었죠.
▶ 김종배 : 비유적인 표현이 하나 있었죠.
▷ 서해성 : 네, 그렇죠.
▶ 김종배 : 무슨 무슨 탄이라고
▷ 서해성 : 네, 방송에서 하면 안 됩니까?
▶ 김종배 : 고유명사라도 해도 되나?
▷ 서해성 : 그건 뭐... 못할 건 없죠. 하물며 이제.
▶ 김종배 : 지랄탄이라고 그러죠.
▷ 서해성 : 그렇죠. 하도 정말 심하니깐요. 그런데 이한열 학생이 맞았던 건 그 탄은 아니었고요. 그 당시 전투경찰들이 소총에 연결되어 있는 장치를 이용해서 최루탄을 발사하도록 하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장치의 이름은 SY44라는 이제이름인데 그걸 발사를 하게 되면 15도 각도 이하로 내려올 수 없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전경들이 학생들이 미우니깐 그 장비를 일부로 조준사격이 가능하도록 각도조절기를 이제 변조시켰던 거죠. 그런 발사기로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백양로 위로 가고 있었던, 정확하게 말하면 돌아가고 있었던 이한열 학생의 뒤통수가 이제 SY44에 정면으로 맞게 되었던 거죠. 그런데 이게 마침 1960년도 3.15부정선거에 맞서서 싸웠던 학생들 중에 하나가 김주연 학생이지 않습니까? 그 학생은 정면으로 맞았던 것 같은데 그 때도 최루탄이 눈에 명중해서 이제 그 학생은 현장에서 죽었고 이한열 학생은 거의 한 달 가까이 신음하다가 7월 5일날 세브란스병원에서 나중에 돌아가셨던 그런 일이죠. 그런 일들이 이제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깐 6월 10일 날 원래도 크게 집회가 있었을 터인데 이런 것들이 누적된 것에 의해서 직접적 발화가 됐던 것은 실제로 6월 9일날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피격됐었던 사실 그 자체가 국민들을 다시 한 번 크게 흥분케 하는 그런 계기가 됐습니다.
▶ 김종배 : 제가 지금도 기억도 나는 게 그래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 6.29선언 이후였던 걸로.
▷ 서해성 : 그렇습니다. 7월 9일이었습니다.
▶ 김종배 : 제가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그 때는 서울광장 아니고 시청 앞 광장.
▷ 서해성 : 서울 시청 앞 광장이죠.
▶ 김종배 : 거기서 노제를 지낼 때 100만 명이 모였던, 그 때 이른바 넥타이부대라고 하는 단어도 그 때 처음 생겼던 걸로 제가 기억을 하는데 그러니깐 직장인들이 넥타이를 매고 나와서 같이 하고자 했던...
▷ 서해성 : 전국의 대학생들이 그 당시에요, 학생들이 슬로건으로 외쳤던 말이 100만 청년 학생회였습니다. 실제로 100만이 안 됐습니다. 87년도에. 그런데 100만이라고 흔히 말하니깐 했던 것인데 실제로 백양로에서부터 제가 백양로에서부터 시청까지 다 같이 이동했었습니다, 그날. 그러니깐 실제로 연세대학교 정문에서부터 신촌로터리를 지나서 그 시청 앞까지 도착했을 때 그 어디 한군데 물 샐 틈 없이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 김종배 : 맞아요.
▷ 서해성 : 그런 점에서 실제 100만 명이 충분히 모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 대개 우리가 그 때 150만이 모였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한열 학생의 고향이 광주인데, 광주 망월 묘역, 구 묘역이죠. 광주시민이 그 때 100만이 안 되었는데 광주에 모인 사람이 50만이었습니다. 그러니깐 대단한 일이었죠.
▶ 김종배 :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6.29선언까지 이게 쭉 이어졌던 건데요. 그런데 사실 그 과정이 우여곡절을 얘기하자면 시간이 엄청 많이 해야 되는 건데 그걸 다 여기서 짚을 수는 없고. 근데 중간에 사실은 이상한 기류가 한 번 있었는데 무슨 위수령을 발동한다는 이런 얘기 한 번 돈 적 있지 않았습니까?
▷ 서해성 :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그게 소문이었나 그냥 그러고 말았던 일이 있었는데 실제로 전두환이 6월 19일날 군에 동원 지휘를 이미 명령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혔습니다. 근데 그 당시에 그게 미군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참 놀라운 일이에요. 미군이 봤을 때 전두환 체제는 더 이상 필요없다고 봤던 거겠죠. 사실은 이게 또 아쉬운 게 현재까지 그 당시에 전두환이 다시 한 번 광주 학살처럼 이제 서울에서 학살을 감행할 수도 있었다는 굉장히 위험한 그런 순간이 있었는데 사실은 이 부분에 대한 지휘권 행사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조사된 바가 없습니다. 사실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서 그런 것들을 한 번 조사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사실상 주권 행사를 한 것이고 헌법을 직접 탄생시킨 그런 과정에 그 당시에 불위의 권력이 사실은 광주학살을 통해서 집권한 그 권력이 다시 한 번 학살을 감행하려고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김종배 : 네, 그렇습니다. 청취자께서 문자주셨는데요. ‘저는 86년 건대 항쟁 때 전원 구속자 가운데 한 명 이었고 무자비한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로 패배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87년 6월 항쟁은 내게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가슴 벅차게 안겨 줬던 또 그걸 봤던 그런 계기였다’고.
▷ 서해성 : 전적으로 맞는 말씀이십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을 바쁘게 하다 보니깐 건대 항쟁을 빼 먹고 말았습니다. 사실 86년 건대 항쟁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이게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학생들을 한 명도 빼 놓지 않고 구속했고 우리나라 구속사상 단일사건으로 가장 많은 구속자를 넣은 사건입니다.
▶ 김종배 : 1500명 가까이 됐을 거예요. 그 때.
▷ 서해성 : 네, 그러니깐 그 분이 문자메시지를 보내 주시니깐 사실 그 문자메시지를 읽는 동안에 제가 가슴 뛰네요. 제가 사실 어떤 단체와 관련돼서 그 현장에 구속된 그 현장에 그런 표석을 하나 세우는데 제가 기획을 해서 하나 세운 적이 있습니다.
▶ 김종배 : 어떤 표석이었습니까?
▷ 서해성 : 인권에 관한 항쟁에 대한 표현보다는 그 당시에 구속자가 많이 났던 거기 그것을 길여서 작년에 거기에 인권표석을 하나 세운 기억이 하나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고요. 자, 그리고 그 때 물론 주역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코 시민들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고요. 다만 그것을 조직하고 했던 단체가 있었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고 있었고
▷ 서해성 : 국본이라고 그랬죠.
▶ 김종배 : 줄여서 국본이라고 그랬죠. 또 대학생 조직 전대협이 있었고.
▷ 서해성 : 전대협이 그럴 쯤에 막 결성된 순간이었죠.
▶ 김종배 : 그 때 그 거기서 활동했던 사람들 지금 뭐하고 있죠.
▷ 서해성 : 우선 학생을 얘기하면 뭐 다 아시는 이인영이라는 사람이 전대 1기 회장이었죠. 그리고 그 때 부의장이 우상호 라는 사람이었죠. 지금...
▶ 김종배 : 더불어민주당 조금 전까지 원내대표 하셨던 분이죠.
▷ 서해성 : 그만 뒀습니까?
▶ 김종배 : 아니 임기 끝났고.
▷ 서해성 : 아, 임기가 끝났습니까?
▶ 김종배 : 그래서 우원식 의원이 원내대표가 됐습니다.
▷ 서해성 : 그렇군요. 그리고 그 당시에 대표분들이 열한 분이었는데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던 박형규 목사님 그리고 김승훈 신부님 6월 항쟁에 이 분은 뺄 수가 없죠. 사실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날조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 해 5월 18일날 명동성당에 있었던 5.18미사에서 그걸 폭로하셨죠. 그걸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부영 선생 역할도 있었던 것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 김종배 : 국회의원까지 하셨던.
▷ 서해성 : 네, 그리고 지선 스님. 지금 또 활동하고 계시는 지선 스님이 불교계의 대표셨고 계훈제 선생님 늘 고무신 신고 다니셨던 계훈제 선생님. 그리고 돌아가신 이우정 선생님 기독계를 개신교를 대표해서 그리고 언론을 대표한 송건호 선생님 돌아가셨죠. 한겨레 신문사장님 하셨고 그리고 박영길 장로님, 문익환 목사님 그 부인이셨죠. 구속자 가족을 대표해서 그 때 문 목사님 구속 중이셨습니다. 그래서 박영길 장로님이 대신하셨던. 그리고 예술가 중에선 고은 선생님 그리고 민주당 당시 그 야당을 대표했던 양순직, 김병윤 그리고 법조계, 오늘날 민변 같은 것의 기원이 되는 것인데 한승원 변호사님 이런 열한 분들이 대표셨는데 사실 이 자리에서 고마움을 꼭 표시하고 싶습니다. 제가 공식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만 그것을 6월 항쟁을 선언했던 그 지도부 현장은 성공회 본당이었습니다. 그러니깐 지금 서울 시청 바로 건너편 성공회 본당에서 거기 와서 이제 이 분들이 발표하셨는데 그 때 한 분이 못 들어오셨어요. 이돈명 변호사였습니다. 이 변호사님 못 들어오신 게 너무 잘 된 게 이렇게 말하면 그런데 왜냐하면 그러니깐 열 분이 선언을 하신 거예요. 6월 10일날 정오였습니다. 그런데 못 들어갔는데 일단 지도부가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변호사님께서 안으로 못 들어오신 바람에 그 당시 집회를 명동, 영등포 연설을 하신 거죠. 그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감격적인 순간들 왜냐면 지도부가 현장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그렇게 했던 기억이 나고 또 하나 꼭 제가 성공회 본당에다가 시민으로 감사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그 당시에 그 분들이 들어오게 할 수 있었던 핑계가 뭐였냐면 그 이제 미사가 있는데 성공회 미사를 말하는 거죠. 피아노를 연주할 봉사자가 필요하다 라는 이유로 시민들을 들어오게 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987년 6월 10일 정오에는 피아노 소리가 있다. 그러나 피아노는 연주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피아노 소리가 함께 있다는 생각을 같이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피아노 연주는 없었으나 그런 과정을 통해서 왔다고 하는 것도 같이 기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자, 이제 좀 정리를 해야 하는 시점이 온 것 같은데요. 그 때 그 치열했던 모든 시민들이 하나가 됐던 그런 경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완으로 사실은 기록되고 있지 않습니까? 6월 민주항쟁이 왜 미완으로 기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 서해성 : 먼저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6월 항쟁, 6월 시민항쟁을 탄압했던 사람들에게 먼저 꼭 한 마디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 탄압했던 사람들이야 6월 시민항쟁의 가장 많이 혜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위대한 점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혜택은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그 대표적인 이익을 본 사람이 박근혜 씨죠. 만일 6월 항쟁에 의해서 이 헌법체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박근혜 씨는 대통령이 될 수가 없었죠. 그리고 또 하나 대표적인 혜택을 본 사람이 이명박 씨죠. 이명박 씨도 6월 항쟁이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 전두환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데 지금까지 전두환, 노태우가 대통령 하고 있을 가능성이 실제로 적잖아 있다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그러니깐 무슨 얘기냐면 그 데모꾼이라고 비난하거나 혹은 6월 항쟁을 비난하거나 광주민주화 운동을 비난하거나 하는 분들에게 꼭 들려드리고 싶은 얘깁니다. 그렇게 말하는 여러분이야말로 가장 이 민주주의의 혜택을 받고 있는 분들이라는 점을 꼭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6월 항쟁이 미완이다. 이렇게 말씀하는 것 정말 맞습니다. 그 당시에 주장했던 여러 가지 것들 한꺼번에 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30년이 지나도 불구하고 미완성인 상태로 있습니다. 모든 혁명은 저는 그런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최고의 숭고한 단계의 민주주의까지를 6월 항쟁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6월 항쟁 가치는 더 발전적으로 계승되어야 한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더 발전적으로 계승되어야 한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미완 이라는 뜻 보다는 더 발전적으로 계승되어야 한다는 말씀드리고 싶고 그 당시 주역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문재인 이 분들이 다 6월 항쟁에 의해서 아들들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두 분은 서울에서 하셨고 두 분은 부산에서 하셨는데 그 대통령 네 분의 대통령이 6월 항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도 같이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지금 문자가 계속 오고 있는데 ‘그 당시 6월 항쟁 때 퇴근하고 올 때 경찰이 학생을 막 때리면서 연행하길래 내가 왜 연행을 하냐고 따지니깐 저도 경찰차에 태워서 영등포 경찰서에서 조사 받고 다음 날 풀려났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경찰서 갔네요. 56년 살면서 처음 경찰서 간 경험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네요.’
▷ 서해성 : 아닙니다.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점점 더 경찰력 불의의 경찰력이 점점 더 무력화 됐던 것이거든요. 시민들의 항의가 없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겁니다.
▶ 김종배 : 그리고 앞서 보류했던 문자를 이제 질문 삼아서 작가님하고 같이 이야기 나눌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이런 문자를 주셨어요. ‘당시 수많은 희생의 대가로 그렇게 힘들게 쟁취한 고귀한 민주화의 열매의 대부분이 과연 지금 누구에게 있을까요? 또 제대로 돌아갔는지 냉정하게 성찰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미완으로 기록된 이유, 어쩌면 이거하고 맥이 닿는 그런 문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서해성 : 네, 사실 이 부분을 몇 가지로 나눠서 얘기 할 수 있는데요. 시간이 없어서 합니다만 짧게 말씀드리면 사실 그 당시에 이른바 혁명은 성공은 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성공하지 못했죠. 그것이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했던 것이 애초부터 반쪽으로 출발했던 것이죠. 사실 시민 항쟁에 있어서 쟁취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민주정부가 출현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고 군사독재가 연장되었습니다. 애초부터 출발이 잘못 꿰어진 측면이 있었던 것이죠. 그 결과에 의해서 다시 이제 91년도 90년도에 이제 이른바 3당 합당, 야합이라고 하는 형태로 다시 한 번 6월 항쟁 성과가 굴절되는 정치권력 측면에서 그런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말씀도 꼭 드리고 싶습니다. 6월 항쟁 이후에 비로소 NGO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등장하게 됩니다. 무슨 얘기냐면 이 말 아주 중요한 말인데요. 그 전까지는 그냥 반독재운동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민주화 운동이라는 건 사실은 정확하게 반독재.
▶ 김종배 : 반독재민주화운동 이렇게 불렀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반독재적 성격이었는데 그렇지 않고 시민의 생활 영역에서 주체가 되어서 하나씩 사소한 문제들을 그리고 그런 모순들을 돌파해 나가는 것으로써의 시민주체운동인 NGO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고 하는 것도 같이 생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서 작가님께서 6월 19일 그 전두환 당시 대통령 각하께서 출동 명령까지 내렸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대목을 듣고 문자 주셨는데 ‘6월 항쟁 당시 저는 수도방위사령부에 근무했는데 바로 그 날 실탄까지 지급받았었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 서해성 : 아, 이분은 제가 통화를, 이 방송이 끝나면 통화를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런 분들이 증언이 결국 모여야 결국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께 꼭 여쭤 보고 싶은 게 이겁니다. 정치권에서 걸핏하면 이야기 나오는 것, 87년 체제는 이제는 끝내야 한다. 그러면서 개헌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주장을 합니다. 87년 체제라고 하는 게 바로 6월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써... 이런 어떤 정치권의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이세요?
▷ 서해성 : 근데 그 분들 말 속은 87년 체제라고 하는 것 자체를 이제 부정하려고 한다기 보다는 87년 체제가 만들어 낸 이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대통령 권력이 현재 5년 단임제로 되어 있는 것, 이 부분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지 않느냐 당시에는 독재를 막고자 장기 독재를 막고자 하면서 단임제 제도를 도입했던 것인데 그 부분이 하나가 민주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라는 점에서 4년 중임제 주장하는 부분이 하나가 있고요. 그 뒤로 또 하나 87년 체제에서 다 담아내지 못했던 인권에 관한 기본권에 대한 조항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뭐냐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는 인권의 조항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부분이 현재 미흡합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더 확장되어야 한다는 그러니깐 민주주의의 확장으로써 87년 체제가 다른 체제의 이행하는 건 동의할 순 있지만 그렇지 않고 보수주의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이른바 온 스팟 개헌 방식으로 가서 87년 체제가 갖고 있는 정신을 되려 후퇴하는 개헌이라고 한다면 저지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깐 지금 잠깐 말씀은 87년 6월 항쟁을 통해서 정치적 민주화는 달성됐을지 모르겠지만 사회적 민주화까지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 서해성 : 아직 달성되지 않았죠.
▶ 김종배 : 그런 얘기 많이 했었는데요. 그 말씀을 하시는 것 같고 이젠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저희가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특별한 노래 한 곡을 같이 들으면서 마무리 할까 싶습니다. 그래서 작가님께서 꼭 아침이슬을 들어야 된다고. 왜냐하면 당시에 학생과 시민이 같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라고 강추를 해 주셔서 김민기 씨의 아침이슬 들으면서 오늘 <박학다설>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작가님.
▷ 서해성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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