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서해성의 박학다설] 아리랑은 어떻게 아리랑이 되었나

지혜롬

tbs3@naver.com

2018-03-16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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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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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8. 3. 16. (금)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서해성의 박학다설] 아리랑은 어떻게 아리랑이 되었나



    ▶ 김종배 : 여러분들이 기다리셨던 코너입니다. 박학다설 시간인데요. 우리시대의 지식광대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서해성 :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한 주 잘 보내셨고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지난주에 아리랑 말씀을 해주셨고, 오늘은 그 속편이 되는 건가요?

    ▷ 서해성 : 네. 속편이라기보다 이제 오늘날 같은 아리랑을 해방이 된 뒤에 그걸 본조아리랑이라고 불렀거든요. 본조라는 뜻은 으뜸이다, 이것이 본줄기다, 이런 뜻이지 이것이 기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 가면 원조김밥집, 이런 것처럼,

    ▶ 김종배 : 그렇죠. 원조 많죠. 원조가 너무 많으니까 진짜원조 나오고,

    ▷ 서해성 : 이게 널리 불렸다, 그런 뜻이고요. 그러니까 본조를 혹시라도 기원이 되는 아리랑을 생각하시면 안되겠습니다. 기원이 되는 아리랑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충분히 말씀을 드렸고 어쩌다가 이제 아리랑이 이렇게 한국인이 사는 170여개 나라에서 다 부르게 되었는가 하는 그 계기가 된 영화 아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그 영화 아리랑 이야기하기 전에 지난주에 1917년이었나요? 독일포로수용소에서 아리랑 녹음한 그 음원이 아직 남아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 훔볼트대학, 그러니까 과거 이 대학이 베를린대학입니다.

    ▶ 김종배 : 훔볼트대학 유명한 대학이잖아요. 많이 들어본 대학인데,

    ▷ 서해성 : 그렇습니다. 피테가 선생을 했고 마르크스도 여길 나왔고요. 그런 대학인데 유명한 철학자들이 많이 나온 그런 대학이죠. 훔볼트대학에 있는 아카이브에 이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훔볼트대학이 우리에겐 널리 안 알려졌냐면요. 동베를린, 서베를린 나뉘면서 이게 딱 동베를린 경계에서 바로 100m 정도 가면 훔볼트대학이 나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위치가 거기였어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학을 안 갔는데 근래에는 유학을 많이 가고 있습니다. 흔히 베를린대학은 이 대학을 말하는 거고요. 분단이 된 뒤에 베를린대학은 베를린프라이유니버스타트, 자유대학이라는 것을 나중에 줄여서 베를린대학이라고 했는데요. 이 대학은 하여튼 원래 오리지널베를린대학, 훔볼트대학에 그게 있었는데 과거에는 우리가 접촉할 수가 없었죠.

    ▶ 김종배 : 동베를린이니까, 동독에 있었으니까,

    ▷ 서해성 : 그렇죠. 접촉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독일이 한 나라가 되고 그러면서 소통하다가 한국에 이게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 김종배 : 한 번 들어봐야죠. 작가님께서 어렵게 구하신 음원을 저희한테 제공을 해 주셨는데요. 잠시 감상을 하죠.

    ▷ 서해성 : 노래를 두 곡 들려드렸습니다. 아리랑은 똑같은 아리랑인데 하나는 앞에 부른 것은 김그레고리라고 하는 분이 부른 아리랑이고요.

    ▶ 김종배 : 신원도 이미 다 기록이 되어 있나 보네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아카이브다보니까 이게 조사가 되어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 부르신 분은 안스테판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 김종배 : 이게 1917년에 녹음, 딱 100년 전에 녹음을 한 거잖아요.

    ▷ 서해성 : 네. 101년 된,

    ▶ 김종배 : 이역만리 독일포로 수용소에서,

    ▷ 서해성 : 네. 이분의 아버지들은 아리랑고개를 넘어서 러시아령으로 가실 거고요.

    ▶ 김종배 : 저는 그러면서 이 노래를 잠깐 들으면서 이분들이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이 아리랑을 불렀을까 한 번 상상을 해봤는데 솔직히 상상이 잘 안 되네요.

    ▷ 서해성 : 안 되죠. 그러니까 아마 이분들이 자기가 한국인이라는 걸 입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유일한 것이 신체의 피부, 피부는 그렇게 증명할 수가 없죠. 일본인도 같고 중국인도 같으니까, 그런데 아리랑이라고 하는 이 노래, 영혼의 주민등록증? 호적초본 같은 그런 걸로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아무튼 이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바로 이 아리랑을 직접 들으신 분은 아마 색다른 시선 우리 애청자 여러분들 말고는 별로 없으실 것 같아요.

    ▷ 서해성 : 많지는 않으실 겁니다. 방송에 나왔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고요.

    ▶ 김종배 : 아무튼 귀한 경험을 서해성 작가님 덕분에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해성 : 네. 그런데 지난번에 아리랑을 말씀드렸기 때문에 말씀드리자면 두 번째 들었던 아리랑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안스테판이 아라랑이라고 발음합니다.

    ▶ 김종배 : 아라랑?

    ▷ 서해성 : 네. 지금 아리랑이라고 하니까 과거에도 다 아리랑이라고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다는 겁니다. 여기 이 녹음테이프를 들어봐도 아라랑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선아라리를 생각해보시면 되겠죠. 그러니까 아마 그 당시에는 아리랑, 아라랑, 아라리, 이런 말들이 혼용되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들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그러면 이번부터는 영화 아리랑, 바로 아리랑이 대중화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영화 아리랑이라고 지난주에 말씀을 해 주셨던 거잖아요. 영화 아리랑 소개 좀 더 자세히 해 주세요.

    ▷ 서해성 : 영화 아리랑은 우리나라 영화에서 가장 큰 영향력이라고 할까요?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런 영화입니다.

    ▶ 김종배 : 사실 영화 아리랑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영화 아리랑을 직접 본 분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아요.

    ▷ 서해성 : 살아있는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이 테잎이 남아있질 않습니다, 필름이.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보니까 다시 우리가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부분, 부분은 남아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럼 티비에서 틀어주는 건 아주 짧은 것,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전체가 아니고?

    ▷ 서해성 : 나머지 기록들은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의 증언에 따른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화 아리랑이 굉장히 뭐랄까, 과장되게 내지는 사실보다 조금 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굉장히 가치가 다르게 평가된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그런 부분들이 사실 있습니다.

    ▶ 김종배 : 저도 잘못 알고, 저는 티비, 이런 데에서 잠깐씩 틀어줘서 이게 다 복원이 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군요.

    ▷ 서해성 : 그건 아닙니다. 현재 일본인 한 사람이 이걸 보관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데 이 양반이 한국인에게 이걸 보여주지 않고 통일이 되면 주겠다고 그랬는데 이 양반이 돌아가셨어요.

    ▶ 김종배 : 일본인이?

    ▷ 서해성 : 네. 일본인이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아마 어딘가에는 한국에도 있을 가능성이 있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따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52년도까지도 대구에서 영화가 상영되었거든요.

    ▶ 김종배 : 진짜 52년까지요? 극장에서?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영화가 30년 가까이 상영된 그런 영화입니다.

    ▶ 김종배 : 그건 세계기록 아니에요? 이건 기네스에 올라가야 될 것 같은데 30년 동안 극장에서 상영했다면 최장기록 아니야?

    ▷ 서해성 : 거의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아리랑에 대한 한국인들의 고유한 마음을 빼앗기는 것 내지는 마음을 씻는 것, 그런 것들이 특별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 나운규라는 분이 재미있는 곳에 살았는데요. 고향이 회령입니다. 북한이죠, 지금. 두만강가의 회령인데 회령하면 그냥 지명이 아니고요. 그게 바로 러시아령으로 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관문 같은 곳입니다.

    ▶ 김종배 : 경로가 그렇게 되나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지금도 탈북자가 가장 많이 나오는 지역 중에 하나가 회령을 거쳐서,

    ▶ 김종배 : 회령 거기 두만강을 건너려면 거기가 가장 강 폭이 좁은가보군요?

    ▷ 서해성 : 네. 그리고 거기에 사람들이 좀 사는 데니까요. 그런 곳인데 서울대학교에 이두현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 은퇴하셨는데 이분이 민속학자세요. 이분이 남긴 기록을 찾아보니까 이분 부모님이 간도로 가는 도중에 어머니가 산기를 느끼셨답니다. 그래서 회령의 어느 집에 들른 거예요. 들렀는데 그게 바로 나운규의 집이에요.

    ▶ 김종배 : 그러면 그 조상 대대로 거기에 산 게 아니고?

    ▷ 서해성 :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나운규의 집은 거기 살았는데, 그 나운규 감독, 영화배우, 영화인의 집은 거기였는데 나운규라는 사람의 집이 정확하게 우리가 어딘지를 알지 못하죠, 지금 북한이니까. 그런데 나그네들이 들릴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거죠. 난데없이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집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거고요. 회령 어느 약간 외곽 쪽에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강을 건너기 직전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거죠. 이 말은 아주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 김종배 : 어떤 점에서요?

    ▷ 서해성 : 왜냐하면 회령은 러시아하고 가깝고요. 청나라죠, 중국하고도 가깝고요. 당시 한국문화는 당연히 한국인이니까 한국문화에 노출되었을 거고요. 그 당시 일제 지배였으니까 일본문화에도 노출되었을 거고요. 그런 국제적인 감각을 나운규가 가질 수 있는 그런 특성이 있고요. 또 하나는 나운규가 거기서 학교를 회령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어디로 가냐면 바로 문익환, 윤동주, 이런 분들이 다녔던 명동중학교, 그곳으로 이제 학교를 갑니다. 그러니까 이 양반의 경험 자체가 굉장히 다국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양반이 거기서 3.1운동에 가담을 해요. 명동중학교 3.1운동에, 그래서 지명수배가 됩니다.

    ▶ 김종배 : 중학생이?

    ▷ 서해성 : 네, 중학생이. 지명수배가 되어가지고 친구들은 잡혔는데 이 양반은 몸이 좀 빨랐던 것 같아요. 도망을 갔는데 어디로 도망을 갔냐면 시베리아로 도망을 갔습니다. 더 재미있는 얘기 해드릴게요. 그런데 이분이 그 당시 백군하고 적군이 싸우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렇죠. 그때 내전기간,

    ▷ 서해성 : 네. 시베리아 내전기간, 러시아 내전기간이니까 그때 이분이 백군이 됐어요.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네. 백군의 용병이 된 거예요. 그래서 이 양반이,

    ▶ 김종배 : 이런 경력이 있었어요?

    ▷ 서해성 : 이분이 영화를 그냥 만든 게 아니에요. 이 양반이 뭔 내력이 있는 양반이에요. 그래가지고 이제 거기서 다시 국내로 들어옵니다. 배가 고프고 이래가지고 갈 데가 없어가지고, 들어와서 다시 이번에는 무산령이라고 하는 고개를 지나는 일본이 건설한 기차터널을 폭파하는 임무를 가지고 자기 친구랑 둘이서 그 행동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

    ▶ 김종배 : 동해번쩍, 서해번쩍이네.

    ▷ 서해성 :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가지고 그걸 했는데 실행에 옮기려다가 미수에 그쳤습니다.

    ▶ 김종배 : 친구하고 둘이?

    ▷ 서해성 : 네. 그런데 그 위에는 누가 있었냐면 홍범도 장군이 계셨습니다. 그냥 우리는 이렇게 너무 쉽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나운규라고 하는 사람이 한 인간자체가 정말 영화적인 인물입니다.

    ▶ 김종배 : 경험이, 완곡하게 보였는데 엄청난 여러 가지 경험을,

    ▷ 서해성 : 이때가 10대에요. 그리고는 이 양반이 서울에 왔어요. 서울에 와서 중동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지금 조계사에 있었거든요, 당시 중동학교가요. 그 조계사 뒤쪽에 있었는데 거기를 다니고 있는데 회령에서 경찰이 온 거예요, 헌병이.

    ▶ 김종배 : 잡으러?

    ▷ 서해성 : 잡으러 온 거죠. 옛날 기차 폭파하려고 했던, 터널 폭파하려고 했던 그게 증거가 나온 거죠. 그래서 다시 청진감옥 교도소에 가서 형무소, 그 당시에는 이름이 형무소였죠. 형무소에 가서 1년 반을 복역하는 거예요. 이 양반 독립운동가였어요, 기본적으로는.

    ▶ 김종배 : 그러네요. 항일투쟁을 하셨네요.

    ▷ 서해성 : 거기서 이춘성이라는 분을 만나가지고 이 양반이 거기서 춘사라는 호를 줍니다.

    ▶ 김종배 : 춘사 나운규.

    ▷ 서해성 : 이춘성이 자기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고 그러면서 춘사라고 역사 사자인데 그래서 이 춘사라는 호를 얻게 되는 건데 춘사 나운규라는 말 자체에서 춘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분이 독립운동 할 때 얻은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같이 생각하시면서 나운규의 영화를 생각해보시면 되겠다, 말씀을 드립니다.

    ▶ 김종배 : 그러면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이라고 하는 걸 왜 만들었을까요?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을까요?

    ▷ 서해성 : 그러니까 이 양반이 그걸 증거가 명백하게 남아있는 인터뷰 기록이 여러 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인들이, 나운규의 말입니다. 제가 그걸 요새말로 약간 바꿔서 말씀드려보면 조선사람들이 양화, 그러니까 서양영화죠. 영화를 볼 때 숫자로는 서부 활극을 본다.

    ▶ 김종배 : 서부극이 이때도 많았구나.

    ▷ 서해성 : 그랬던가 봐요. 서부 활극을 보고 그러니까 주로 로빈훗, 이런 것들도 같이 본다는 거죠. 그런데 한국영화는 점점 관객이 나날이 멀어져가고 있다, 이런 생각을 이 양반이 한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이번에 작품을 만들려고 할 때는 졸립고 하품이 나지 않는 작품을 만들겠다. 모든 영화감독의 꿈이겠죠. 그런 걸 하면서 스릴이 있어야 되고 유머가 있어야 한다.

    ▶ 김종배 : 액션블록버스터.

    ▷ 서해성 :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굳이 말하면 액션블록버스터에요. 왜냐하면 이분이 이렇게 말했어요. 이 작품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800이라는 사람이 출연했다. 800명이 출연했다는 겁니다.

    ▶ 김종배 : 대작이다?

    ▷ 서해성 : 대작이다, 그 말이죠. 그러면서 이분이 이런 표현을 썼어요. 아리랑은 의외의 환영을 받았다, 이랬어요.

    ▶ 김종배 : 의외의 환영?

    ▷ 서해성 : 네. 의외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이건 졸음이 오는 사진이 아니었고, 사진이라는 말은 옛날에 활동사진이라고도 했고 연속사진이라고도 했습니다, 영화를. 그러니까 사진이 아니었고 우스운 작품이었다. 유머가 있다, 그 말이겠죠. 느리고 사진이 아니고 템포가 빠르고 스피드가 있었다, 이렇게 영화에 대한 표시를 냈어요. 이 양반이 영화를 만들고 한참 인기 있을 때 한 인터뷰입니다. 그런데 이제 영화 아리랑에 대해서 이 방송을 들으시고 계시는 분들도 엄청나게 잘 알고 계실 거예요. 감각으로는, 많이 들어봤으니까, 그런데 비평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아리랑 영화에 대해서. 조금 다른 견해들이 있습니다.

    ▶ 김종배 : 어떤 건데요?

    ▷ 서해성 : 지금 인터뷰 내용이 영화 아리랑에 대한 나운규의 핵심적인 증언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봐도 이 양반이 무슨 민족적 대작이나 민족저항의 영상을 꼭 만들어야겠다. 나는 신념이 거기에 다 투사되었다, 이렇게 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 김종배 : 오히려 인터뷰 내용 그대로 들으면 상업영화 같이 다가오고, 그렇잖아요? 아주 재미있으니까 많이 와서 보세요. 거기다가 투자 많이 해서 800명이나 동원된 영화니까 대작이에요, 재미있어요. 이거잖아요, 지금?

    ▷ 서해성 : 바로 그거에요, 제가 말씀드리는 게. 이분도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영화 아리랑 결국 어떻게 오늘날까지 이름을 떨친 영화가 되었는가? 그게 뭐냐면 이 영화가 개봉된 게 1926년도 10월 1일입니다. 이 날이 무슨 날이냐면요. 조선총독부가 남산에 있다가 경복궁 앞으로 옮겨가서 기념식을 한 날입니다. 나운규가 그렇게 잡았는지, 단성사가 그렇게 잡았는지, 허가가 그렇게 났는지, 그건 알 수 없으나 그날 한 거예요.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1926년도가 무슨 해입니까? 6.10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좌절된 해입니다.

    ▶ 김종배 : 6.10만세운동이 26년이었나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순종황제가 돌아가셨고 그에 따라서 6월 10일 크게 봉기를 했는데 우리가 6월 10일이 두 개가 있지 않습니까? 87년 6월항쟁이 있고, 이때 엄청난 사람이 들고 일어났죠. 바로 19년도에 3.1운동이 일어났던 것과 거의 맞먹을 정도의 거대한 대중의 봉기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알다시피 봉기가 최종적 성공을 거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을 때 대중이 느끼는 좌절감, 그런데 한국적 얘기를 다룬 거예요, 이 얘기가.

    ▶ 김종배 : 지금 작가님 말씀 듣다보니까 퍼뜩 떠오르는 게 문학하시는 분들이, 작가분들이 이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에 작가의 것이 아니다, 독자의 것이다, 이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딱 그거 아니에요?

    ▷ 서해성 : 이게 전형적인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일제강점기 떠올릴 필요도 없고 유신 때 떠올리시면 됩니다. 유신 때 이름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만 몇몇 포크송이 그냥 자기가 그냥 만들었는데 대중들은 저건 박정희를 풍자한 걸로 생각하는 풍습이 많았거든요.

    ▶ 김종배 : 그렇죠. 오히려 대중들이 어떤 작품에 역사성과 사회성을 부여하는, 딱 그거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지금 그래서 그 LP 1장 구하기가 100만 원짜리인 70년대 포크송들이 있거든요, 실제로요.

    ▶ 김종배 : 100만 원씩 해요?

    ▷ 서해성 : 100만 원씩 합니다. 100만 원 호가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 영화에도 대중들이, 일제가 워낙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고 검열이 심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영화에서 어떤 장면 하나만 나오면 더 길게 찍었는데 가위질 했을 것이다. 실제로 안 찍었는데, 충분히 그런 상상들을 하고 관객들이 상상으로 그 영화가 나와 있는 것들을 메우는 거예요, 거꾸로요. 그러면서 정말 나운규는 애써서 더 민족저항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이렇게 만든 것이다.

    ▶ 김종배 : 잠깐만, 그런데 지금 작가님 말씀 듣고 갑자기 궁금해진 게 하나 있는데 이때는 유성영화가 아니라 무성영화 시대 아니에요?

    ▷ 서해성 : 무성영화였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영화 아리랑을 계기로 해서 아리랑이라는 곡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는 게 어떻게 성립이 돼요?

    ▷ 서해성 : 마저 말씀드릴게요. 우선 이런 겁니다. 그럼 만약에 일본이 검열이 그렇게 심했고 영화 아리랑이 민족적인 저항내용만을 일관되게 다뤘다고 한다면 검열을 피하기는 못했을 겁니다.

    ▶ 김종배 : 못하게 했겠지, 상영을.

    ▷ 서해성 : 그렇죠. 바로 그 얘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역시 당시 관객, 그러니까 한국인이 만들어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영화에 대한 상상력을, 일본을 정말 심하게 했는데 그 영화를 상영하라고 그랬겠습니까?

    ▶ 김종배 : 영화필름 가위질을 다 했겠지.

    ▷ 서해성 : 그렇죠. 아니면 영화가 상영을 못했겠죠.

    ▶ 김종배 : 불태워버렸거나,

    ▷ 서해성 : 아니면 또 하나는 일본인들이 실제로 조선인 강제노역자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줬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보여줬습니다, 필름을 사다가. 이게 무슨 얘기냐면요, 약간의 분노를 배설케 하는 것이 좋다고 본 것입니다, 식민지 통치에서. 일본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식민지 경영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표현해도 좋다고 본 것이죠. 다만 여기서 애드립이 있는 게 가능했는데요. 변사의 애드립이었습니다.

    ▶ 김종배 : 변사가 있었지, 변사.

    ▷ 서해성 : 대본대로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변사라는 것은요? 자기가 중간에 바꿀 수도 있는 거고, 사실은요. 변사가 이렇게 했다는 변사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여러 변사 중에 한 사람이죠, 이 사람은. 이 변사는 자기들이 마음대로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니까요.

    ▶ 김종배 : 어떻게 했는데요?

    ▷ 서해성 : 가령 변사 흉내를 김종배 선생님이 내시는 게 나을까요, 내가 하는 게 나을까요?

    ▶ 김종배 : 저는 못해요.

    ▷ 서해성 : 제가 한 번 흉내를 내보겠습니다. 평화를 노래하고 있던 백성들이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슬픔의 시를 읊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했다는 거죠.

    ▶ 김종배 : 괜찮은데요?

    ▷ 서해성 : 그러면서 서울에서 철학공부를 하던 3.1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났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은, 하고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런 거죠. 그러니까 그러면서 이 영화가 마지막 부분이 이렇습니다. 영진이라는 청년이 일본의 앞잡이를 죽이고 정신이 돌아온 거예요. 떠날 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동리 여러분, 그땐 동네라고 안 그러고 동리라고,

    ▶ 김종배 : 동리라는 말 있었죠.

    ▷ 서해성 : 동리 여러분, 나는 한동안 죽었던 몸으로 이제야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은 웃음으로 나를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내 몸이 이 강산 삼천리에 떼어놨기 때문에 미치었으며 사람을 죽였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내가 일상 불렀다는 그 노래를 부르며 나를 보내주십시오.

    ▶ 김종배 : 그러면서 아리랑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 서해성 : 네. 근사하잖아요. 이런 걸 전형적인 신파라고 합니다.

    ▶ 김종배 : 그렇죠. 신파극,

    ▷ 서해성 : 그러니까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 김종배 : 그렇죠. 신파극 하면 이수일과 심순애,

    ▷ 서해성 : 그렇죠. 그런 버전이죠. 그리고 이건 변사에 대한 기록을 채집해놓은 것 중에 있는 겁니다. 모든 변사가 이랬다는 게 아닙니다.

    ▶ 김종배 : 그러면 단순무식한 질문 하나 드리면, 나운규의 힘이기보다는 변사의 힘이 아니에요, 혹시?

    ▷ 서해성 : 관객의 힘이겠죠. 마지막도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쓸쓸한 초막에 날은 저물고 광활한 저녁바람소리 불어올 때 끌려가는 영진이의 가엾는 자태는 처량한 노래와 함께 멀리로, 멀리로 하염없이 사라진다.

    ▶ 김종배 : 이렇게 감정선을 확 자극한 다음에 아리랑을 부르니 안 퍼질 수가 없죠.

    ▷ 서해성 : 그렇죠. 안 퍼질 수가 없죠. 그러니까 당시 26년도라고 하는 거대한 봉기가 있었다가 좌절되었던 그 시기에 바로 민족적 정서를 일정하게 자극하는, 그러다 보니까 사실은 그러면서 영화를 계기로 영화를 본 사람도 많았지만 노래 아리랑이 한국으로 퍼져나가게 된 거죠.

    ▶ 김종배 : 일종의 ost 같은, 딱 그거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ost하고 조금 더 버전을 높게 잡아야 되는 게요, 그 뒤로 수많은 아리랑이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 노래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퍼지면서 수백 개의 아리랑으로 탄생하게 되는 아리랑의 씨앗이 된 거죠.

    ▶ 김종배 : 그런데 변사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일 것이고, 또 그 여러 명에 따라서 A변사의 아리랑이 다르고 B변사의 아리랑, 그런데 이렇게 히트를 치면 항상 나오는 게 비스무리한 영화가 많이 따라오잖아요. 그런 게 많이 있었나요?

    ▷ 서해성 : 이걸 따라오는 영화들, 영화연극, 그리고 이걸 오마주한 영화들까지도 여러 편이 나왔습니다. 29년도에는 아리랑고개라고 하는 연극이 나왔습니다.

    ▶ 김종배 : 한마디로 요즘 개념으로 대박을 친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아리랑문화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형성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중에서도 꼭 말씀드리고 싶은 건 흔히 이 아리랑고개라고 하는 그 내용에 거의 이 영화하고 유사합니다. 그러니까 토월에 가있는데, 토월이라고 하는 연극단체 있지 않습니까?

    ▶ 김종배 : 토월, 극단 토월?

    ▷ 서해성 : 네. 조선에서 땅을 잃고 북한으로 가는 실향민 이야기입니다. 그때 이 사람들이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는 그런 내용으로 한 거예요. 사실은 이 내용이야말로 내용으로 따지면 더 진지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계속 감시를 받았어요. 연극입니다, 영화가 아니고. 감시를 받았는데 29년도에 이 상연되었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무대 위에 올라간 거네?

    ▷ 서해성 : 네. 그런데 29년이 어떤 해냐면 바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해입니다. 혹시라도 광주학생운동이 지역운동이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광주에서 촉발되었을 뿐이지 전국적으로 퍼진 학생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이런 것들이 같이 맞물렸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러게요. 영화 아리랑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노래 아리랑으로 범위를 좁혀서 얘기를 풀어가야 될 것 같은데요.

    ▷ 서해성 : 그러니까 아리랑이 절정에 이른 게 26년에 시작해가지고 29년에 최고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태어난 것은 6.10항쟁, 6.10만세운동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고요. 광주학생운동을 그 어름에 전국적으로 퍼졌고 국경을 넘어서 수많은 곳에 있는 아리랑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맞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러네요. 26년에 나와서 6, 7, 8, 9, 4년째 계속 영화로도 상영되고 연극무대에도 올라오고,

    ▷ 서해성 : 레코드판이 나왔습니다.

    ▶ 김종배 : 레코드판이 나왔어요?

    ▷ 서해성 :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침내는 광복군아리랑, 광복군들이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건 밀양아리랑의 가락에다가 노랫말을 바꾼 형태의 광복군아리랑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요즘 개념으로 국민가요가 된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국민가요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가요가 된 거죠. 그러면서 이제 경계를 다 넘어서게 된 거고요. 그러면서 우리가 지난 동계올림픽에서 아리랑이 나왔지 않습니까?

    ▶ 김종배 : 정선아리랑이 나왔죠.

    ▷ 서해성 : 그게 이른바 본조아리랑 계통인 겁니다. 그러니까 북한에서도 같고, 남한에서도 같고, 러시아에도 같고, 사할린에서도 같고, 쿠바에서도 같은,

    ▶ 김종배 : 본조아리랑이라고 하는 뜻이 지방별로 버전이 있는 아리랑이 아니라 전국,

    ▷ 서해성 : 서울아리랑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영화에서 나온 게 바로 본조아리랑입니다. 이 영화가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감독이나 작가가 항일의지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독립운동 하셨기 때문에, 이분이. 그러나 그 영화내용 자체가 그렇게 치열하지는 않다하더라도,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우리가 영화 전편이 없기 때문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영화를 계기로 해서 이런 거대한 노래가 구성되었다. 노래집단이 구성되었다는 겁니다.

    ▶ 김종배 : 잠깐만요. 아리랑을 부른 미국가수가 있어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피트 시거라고 하는 가수가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 김종배 : 언제적 얘기에요?

    ▷ 서해성 : 피트 시거라고 하는 사람이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우디 거슬리라고 하는 사람과 함께,

    ▶ 김종배 : 우디 거슬리 들어본 것 같은데,

    ▷ 서해성 : 네. 우리가 흔히 포크송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게 말하면 민속음악을, 트래디셔널한 민속음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뉴모드한 포크송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 포크송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피트 시거가. 우리가 알고 있는 꽃들은 어디로 갔나, 영어로 잘 부르는 그 노래라든지, 위 쉘 오버컴 우리 승리하리라, 이를테면 이런 것 다 이분이 만든 노래고요. 정확하게 이분이 만들었다기보다 하나는 우크라이나 노래거든요. 우크라이나 민요를 가져다가 세계적인 노래를 만든 거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중에 하나가 아리랑이라고 하는 걸 만들었고 아리랑을 만들게 된, 노래를 만들게 된 이유는 바로 님 웨일즈가 쓴, 김산과 함께 쓴 송오브아리랑입니다, 정확하게 영어로는. 아리랑의 노래, 우리말로 번역하면, 한국에서는 아리랑이라 번역되었습니다만 그 김산이라고 하는 항일운동가, 본명은 장지락입니다. 그분의 책을 읽고 거기에 감동을 받아서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피트 시거가 만들었습니다.

    ▶ 김종배 : 우리가 포크송 하면 거기에 저항정신이 담겨있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피터 시거 이 사람도 아리랑이라는 노래에 한 민족의 저항정신이 담겨있다, 이렇게 봤기 때문에 불렀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걸까요?

    ▷ 서해성 :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랑이 갖고 있는 의미가 크다, 이렇게 강조를 했던 것이고요. 님 웨일즈가 쓴, 김산의 얘기를 진술을 해서 받아쓴 거죠. 김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아리랑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항일운동을 그렇게 말했어요. 항일운동을 그렇게 말할 정도로 김산도 아리랑의 노래가 갖고 있는 의미를 중시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 김종배 : 벌써 시간이 다 갔네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아리랑의 힘, 정리한다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 서해성 : 그렇겠죠. 아리랑은, 20세기 한국 아리랑은, 그전에도 있었긴 하나 본격적으로 부른 건 20세기였다. 항일투쟁의 역사, 저항정신의 역사하고 뿌리가 같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은 우리시대의 정말 살아있는 증언자이다. 아리랑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생각하시면 좋겠다. 단지 놀이가 아니라 그 어려웠을 적에 26년도, 29년도, 이럴 때 왜 전국적으로 퍼졌고 국경을 넘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같이 하면서 앞으로 아리랑을 부르실 때 같이 생각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도 아리랑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어느 시대든지 그러겠죠. 이 고개를 넘으면 꽃이 피는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 김종배 : 역시 작가답게 마무리를 또 멋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박학다설 마무리하고 인사 나누겠습니다. 서해성 작가와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해성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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