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 [서해성의 박학다설] 추석특집, 귀향

김훈찬

tbs3@naver.com

2017-10-0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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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
  •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7. 10. 6. (금) 18:00~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서해성의 박학다설] 추석특집, 귀향

    ▶ 김종배 : 추석특집 박학다설입니다. 우리시대의 지식광대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서해성 :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추석 잘 쇠셨죠?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어떻게, 다녀오셨습니까?

    ▷ 서해성 : 저는 부모님께서 다 서울에 사셔서 그런데 사실은 성묘를 가기는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가지 못하기도 했고 또 하나는 집안의 선산, 그 자리로 도로가 지나간다고 해서,

    ▶ 김종배 : 선산이 갈라집니까?

    ▷ 서해성 : 선산을 다 해체해야 되는,

    ▶ 김종배 :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러면?

    ▷ 서해성 : 알아봤더니 요새는 매장하기 참 어려워서 허가가 안 나기도 하고 화장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대부분 조상들은 다 무덤을 하셨잖습니까? 선산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매장을 했다는 뜻인데 그런 상황에 있어서 반드시 성묘는 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저희가 사실은 3주 전부터 추석특집 3종 세트 복권 이야기했고요. 화투 이야기했고,

    ▷ 서해성 : 화투 이야기는 반응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 김종배 : 반응이 상당히 뜨거웠고 ‘진짜 몰랐다’. 그다음에 꼭 따라오는 문자가 ‘서해성 작가님 도대체 못하는 게 뭐에요?’,

    ▷ 서해성 : 김종배 털보가 다 가르쳐준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무슨 소리에요, 겸양의 말씀도. 아무튼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개구리가 왜 등장하는지 솔직히 처음 알았거든요. 그런 사연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오늘이 3종 세트 마지막입니다. 귀향?

    ▷ 서해성 : 네, 귀향. 추석, 설 하면 우리는 사실 화투보다도 귀향이죠. 그래서 사실 추석 3종 세트 중에 마지막 날 추석연휴 동안에 이 방송을 하려고 준비했습니다. 왜 우리는 귀향을 하는가 하는 문제이죠.

    ▶ 김종배 : 왜 우리는 귀향을 하는가? 바로 이 주제로 오늘 이야기 나눠볼 텐데요. 애청자 여러분들도 함께 해 주십시오. 귀향에 얽힌 여러분들의 사연, 스토리 있으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50원의 유료문자인데요. #0951로 보내주시면 되고요. 무료메신저 카카오톡도 열어놓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귀향 이야기를,

    ▷ 서해성 : 선물이 이렇게 많습니까?

    ▶ 김종배 : 네.

    ▷ 서해성 : 보통 때도 선물을 주시는 건 아니죠?

    ▶ 김종배 : 아니죠, 명절에만. 눈독 들이는 선물이 있으십니까?

    ▷ 서해성 : 아니, 제가 받을 수는 없으니까.

    ▶ 김종배 : 그런데 우리는 흔히 귀성이라고 하잖아요?

    ▷ 서해성 : 귀성이라는 말은 중국말입니다. 중국말에서 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도 개념이,

    ▶ 김종배 : 그 성이 그 성이에요?

    ▷ 서해성 : 그 성입니다.

    ▶ 김종배 : 산둥성 할 때 그 성이에요?

    ▷ 서해성 : 네. 영어로 하면 그게 스테이트에 가까운 말인데요. 내이션 스테이트는 아니고요, 그냥 스테이트.

    ▶ 김종배 : 귀성이 중국말이군요.

    ▷ 서해성 : 왜냐하면 그 사람들 워낙에 고향이 멀지 않습니까?

    ▶ 김종배 : 몇 박 며칠을 가야 되고, 장관이라고 표현하기는 뭐하고 정말 어마어마하죠.

    ▷ 서해성 : 원래 중국에서는 귀성이라는 말을 널리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워낙에 중국이 컸고 가령 베이징이나 혹은 장안이나 이런 데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 생신을 맞았다든지 명절을 맞았다든지 하면 돌아가야 했거든요. 대개 그때 운하를 이용했습니다. 중국은 강이 굉장히 발전, 왜냐하면 옛날에는 걷는 것보단 배가 빨랐습니다. 먼 길을 이용했는데 그럴 때 그것을 귀성이라고 불렀고요. 귀향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두 가지 말을 다 자연스럽게 쓰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 김종배 : 웬만하면 귀성보다는 귀향이라는 말을 쓰는 게 맞겠네요.

    ▷ 서해성 : 그런데 귀향도 중국어니까요. 한자 문화권 안에서 파생한 말이니까 저는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 서해성 : 특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문제 있는 말도 아니고요.

    ▶ 김종배 : 그러면 본격적으로 귀향, 왜 돌아가려고 하는가? 이것부터 시작을 해야 될 것 같은데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줄 줄 알았더니 진행자가 안 해주셔서 제가 대신해야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어떤 이야기요?

    ▷ 서해성 : 1시간동안 방송을 한다고 전해 듣고 왔습니다.

    ▶ 김종배 : 맞습니다. 오늘은 충분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박학다설 진행하다보면 시간이 모자라서, 사실은 지난주에 특히 그랬습니다.

    ▷ 서해성 : 우리가 왜 돌아가려고 하는가? 언론에서, tbs가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전통적으로 수십 년 동안 한국인만 갖고 있는 고유한 풍습인양 말해왔지 않습니까? 흔히 말해서 민족대이동이라고 얘기해왔죠. 사실 그건 현상만을 얘기한 것이죠. 왜 이동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전혀 아닌 거죠.

    ▶ 김종배 : 그렇죠. 그 이야기를 하려면 왜 떠났는가부터 얘기가 되어야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사실은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동물도 그렇습니다. 흔히 말해서 수구지심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여우가 죽을 때는 자기가 태어난 언덕을 돌아본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새들도 굉장히 귀소본능이 강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귀소본능이 아니라 흔히 귀소성이라고 말하지만 대개는 다 먹고 살기 위해서 돌아가는 겁니다. 생존을 위해서요. 철새들이 생존을 위해서 이동하지 멋이 있어서, 추억을 위해서 돌아가는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회유성 물고기인 연어 같은 경우도 당연히 알을 안정적으로 낳는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거든요. 생존과 관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들하고 조금 다른 양태를 보인다. 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돌아간다는 것만 가지고 마치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김종배 : 그러면 우리의 귀향 본질은 어떤 겁니까?

    ▷ 서해성 : 먼저 답을 말씀드리면 민족대이동이라고 부르는 귀향, 귀성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개발독재시대의 산물입니다.

    ▶ 김종배 : 이농이 있었으니까 귀향이 있다?

    ▷ 서해성 : 이농이라는 말도 현상을 다룬 말이고 본질은 농촌분해인 거죠.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이 둘이 결탁을 해서 사실 저임금체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냈던 것이 이른바 농촌분해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렇죠. 농촌의 젊은이들을 서울, 이런 데로 올려 보내서 공장의 노동자로 만들고,

    ▷ 서해성 : 그렇죠. 이 사람들에게 서울이라는 것은 그 사람들은 고향을 떠난 실향민이 아니고 탈향민입니다. 고향에서 쫓겨난 거죠.

    ▶ 김종배 : 탈농이죠.

    ▷ 서해성 : 김종배 선생님의 그런 경우 중의 하나인 거죠, 큰 틀에서 보면요. 왜냐하면 가령 시골에서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서 대학까지 나오면 살 수 있는 시스템이어야 하는데 점점 더 서울로 이동했어야 했습니다. 점점 더 서울 학교의 비중이 높아집니다.

    ▶ 김종배 : 청년이 고향에 남아서 먹고 살 뭐가 없으니까,

    ▷ 서해성 : 방법이 없죠, 그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울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거기서 태어난 사람에게 서울은 쫓겨 온 객지인 겁니다.

    ▶ 김종배 : 사실 저희 집 같은 경우는 더 이상 시골에서 먹고 살 게 없어서 서울로 이사를 온 경우,

    ▷ 서해성 : 그런 거죠. 서울은 객지인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아무리 서울에서 좋은 아파트에 살아도 자기가 진자 의지할 귀속처가 없는 거예요. 소속감이 강하지 않은 겁니다. 그게 한국인들이 어디론가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서울에서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것은 경쟁이죠, 생존이죠.

    ▶ 김종배 : 주소지가 서울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추억이라든지 이런 게 보관되어 있는 곳은 아닌 거죠.

    ▷ 서해성 : 이게 불행인 겁니다. 그런 것을 프랑스말, 영어권, 유럽에서 쓰는 말이 생투아르라고 표현하는데요, 성소. 내가 어디론가 가야 되는 곳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인간은요. 그래야만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는 겁니다. 이걸 여성비하라고 말씀하지 마시고, 모태로의 귀환 같은 겁니다. 자궁으로의 귀환 같은 것이죠. 그래서 어딘가 내가 있을 때 굉장히 안정감을 느끼는 공간이 있습니다.

    ▶ 김종배 : 비록 지금 객지를 떠돌고 있지만 나는 돌아올 곳이 있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마지막 보루 같은,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게 인간한테 있어야 되는 건데 문제는 왜 그러면 한국인들이 그토록 서울, 경기도 지역에 2천만이 몰려서 살지 않습니까? 흔히 말해 서울 2천만이라고 합니다. 2천만들이 왜 그것을 못 느끼느냐? 여기 와서 사는 40년 동안, 혹은 50년 동안 성소로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가 고향에서 원해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해서 떠났으면 ‘나는 원해서 떠났는데’ 이렇게 말할지 몰라도 구조적인 면에서 밀려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향에서 가령 300년, 400년 살았던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한국사회의 큰 변동 속에서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는 거죠. 그런데 언론이, 국가권력이 지금까지 해온 것은 민족대이동이라는 이름으로 그 본질을 은닉시킨 거죠. 국가와 자본이 갖고 있었던 폭력적 본질을 은닉시키고 현상만을 다룬 이야기를 해왔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명절 되면 고향 찾아가는 게 미풍양속인 것처럼 미화해왔죠.

    ▷ 서해성 : 사실은 서울에서 지내야 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서울이 고향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30년 살고 50년 살았으면 서울이 사실은 고향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안정감을 이 공간이 주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 김종배 : 그리고 서울에서 떠돌잖아요. 2년마다 한 번씩 셋방 옮겨가면서,

    ▷ 서해성 : 그러니까 성소라고 느낄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사람들은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향에 돌아가도 고향이 아닌 겁니다. 주소지만 고향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큰 문제라고 말씀드릴 수 있고요. 그게 한국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요. 그런 이야기들을 이미 서양에서 주목을 했고요. 산업사회가 어떻게 그렇게 만들었는가에 대해서 유명한 작가인데 토마스 울프라고 하는, 일찍 죽었습니다. 젊어서 30대에 죽었는데 그 사람이 쓴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You can't go home again'이라는 작품인데요. 우리말로 하면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고 하는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향을 못 간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고향에 아무리 가도 고향에 이를 수 없다는 겁니다. 상실이죠. 그렇게 상실을 하게 되면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걸 말하는 것이고, 그런데 이 양반 아주 근사한 표현이 있어요. 실향에 대해서 이렇게 잘 표현한 것이, 이렇게 좋은 문장이 없을 겁니다. 더 위대한 지식을 위해서 그대가 아는 땅을 잃는 것, 더 위대한 삶을 위해 그대가 가진 삶을 버리는 것, 더 위대한 사랑을 위해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것, 내 집보다 더 정겨운 땅을 찾아서. ’내 집보다 정겨운 땅을 찾아서‘ 이게 불가능한 말이지 않습니까?

    ▶ 김종배 : 내 집보다 정겨운 데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 서해성 :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고향을 떠났다는 거죠.

    ▶ 김종배 : 바로 작가님께서 그렇게 해서 고향을 떠났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건 세밀한 묘사가 필요합니다. 귀향이라고 하는 게 꼭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고,

    ▷ 서해성 : 귀향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귀향 안에 은닉되어 있는 본질도 차를 타고 오시는 동안 같이 생각해보시라.

    ▶ 김종배 : 귀향 이전에 탈농이 있었다. 바로 이 지적을 해주셨는데요. 탈농, 어떤 형태로 고향을 떠났는지 세밀한 묘사부터 해보죠.

    ▷ 서해성 : 그 시대에 탈농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노래가 시리즈가 있는데 흙, 고향, 이런 말들이 들어간 노래들이 70년대 가장 많았습니다.

    ▶ 김종배 : 나훈아의 고향역.

    ▷ 서해성 : 흙에 살리라, 이런 노래들이 대히트를 했죠.

    ▶ 김종배 : 향수를 자극하는,

    ▷ 서해성 : 사실 그건 고향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억지로 위로하는 노래였죠. 사실은 그때 고향을 급격하게 떠나고 있었죠.

    ▶ 김종배 : 그렇죠. 1970년대가 최고 피크죠.

    ▷ 서해성 : 빠른 속도로 떠나고 있는데 그때 이른바 고향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한마디로 줄일 수 있는 말이 야반도주입니다. 야반도주는 무슨 말이냐면 짐이 없다는 뜻입니다. 짐이 있는데 어떻게 야반도주를 하겠어요. 몸만 빼서 대도시로 나갔다. 그 당시에 소설가들도 정말 많은 소설가들이 탈향에 대해 썼습니다. 그리고 귀향은 대개 밤에 합니다. 귀향을 하기는 하는데 제삿날, 이렇게 와서 아침 일찍 떠나는, 수많은 작가들이 왜 그렇게 썼겠습니까? 고향을 떠날 때 피치 못할 사연을 가지고 떠났기 때문이죠. 그게 사실은 포괄적으로 이른바 농촌을 해체하는 과정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잘 살아보세’가 있었죠.

    ▶ 김종배 : 제가 궁금한 게 그건데요. 농촌, 내 고향에서 먹고 살 수 있으면 굳이 떠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떠났단 말이에요. 그것은 농촌이 분해되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바로 그 시점에 새마을운동이 있었고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 있었고, 이것 모순 아닙니까?

    ▷ 서해성 : 솔직하게 세월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도 수구 혹은 보수에서 박정희 향수를 갖고 있는 분들이 새마을운동은 정말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 김종배 : 박근혜 정권에서 새마을운동 수출한다고 그러고,

    ▷ 서해성 : 그랬었죠.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만약에 그게 성공했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까? 떠날 이유가 없고 또 하나는 지금 태어나는 아기 울음소리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몇 개 구는 곧 머지않아 없어질 것이라고 하거든요.

    ▶ 김종배 : 제가 바로 그 70년대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때 이른바 주택개량사업, 이런 것 하면서 돈을 지원해주면 주로 어느 집만 하냐면 도로가에 있는 집, 지붕만 바꿔주고,

    ▷ 서해성 : 그리고 슬레이트로 했죠. 발암물질이었죠.

    ▶ 김종배 : 겉모습만 바꿔주고 말 그대로 삶의 기반, 경제적 기반은 전혀 신경도 안 쓰고,

    ▷ 서해성 : 만약에 당시 그게 살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 당시 그토록 빠른 급속화 농촌분해는 없었겠죠.

    ▶ 김종배 : 오히려 기반을 무너뜨렸죠, 정권이.

    ▷ 서해성 :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국가권력이 불가피하게 노동이민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도시로 이동해야 했던 것이죠. 그러나 솔직하게 말했어야죠. 그리고 농촌을 지켰어야죠. 우리가 식량주권 문제 같은 게 생기게 된 게 그때 이미 생기게 된 것입니다.

    ▶ 김종배 : 그때 도시락 검사하고 난리피우고,

    ▷ 서해성 : 그러니까 이런 위기가 온 것이고요. 더구나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동하면서 가장 커다랬던 문제 중의 하나가 농촌분해만이 아니라 그 노동력의 집중이 대자본에 집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익의 대부분이 소수에게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 김종배 : 그렇죠. 지금도 어릴 때 기억이 나는 게 명절에 추석이나 설 되면 그런 대기업, 대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한테 귀향 지원한다고 버스 늘어세워놓고 가는 방면별로 전세버스 지원한다. TV뉴스에 대서특필되고,

    ▷ 서해성 : 굉장한 뉴스인 것처럼 나왔죠. 사실은 귀향에 대한 기만이죠.

    ▶ 김종배 : 전자제품 하나씩 안겨주고,

    ▷ 서해성 : 자기들 재고품, 그렇게 했던 거죠.

    ▶ 김종배 : 지금도 기억이 정말 생생합니다.

    ▷ 서해성 : 그리고 차에서 일하는 차장들에게 옷 한 벌씩, 정확하게 말하면 유니폼을 준 거죠. 그래서 국가권력이 또 그렇게 규율하는, 명절을 이용해서 또 한 번 이른바 선심성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서 대중을 규율하는,

    ▶ 김종배 : 바로 그게 탈농을 해서 도시로 유입이 되어서 공장 노동자가 되니까 ‘봐라, 이렇게 잘 벌고 때깔 좋지 않느냐?’는 환상을 심어주고 후배들 더 탈농하게 만들고,

    ▷ 서해성 : 그렇게 하면서 한국사람들이 이농률이 훨씬 더 높아졌던, 특히 우리나라 서해안 방면에서 많았습니다. 동부, 동해안 쪽은 포항이니 울산이니 공장을 지었지 않습니까? 덜 떠난 겁니다. 서해안 쪽은 그런 게 없었지 않습니까? 평택에서부터 전라도 정도까지 있는 분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농산품을 팔아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죠.

    ▶ 김종배 : 그때 계절노동이라고 해서 저희 동네 아저씨들도 어떻게 했냐면 여름에 농사짓고 겨울 되면 농한기에 도시로, 요즘 개념으로 하면 일용직으로 나가서 돈 벌어서 다시 모내기철쯤 되면 다시 돌아오는,

    ▷ 서해성 :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서울로 귀착하는 거죠.

    ▶ 김종배 : 마지막에는 더 이상 안 되니까 가산 정리해서 서울,

    ▷ 서해성 : 정확한 표현하신 거예요. 장안선타고 4시간, 5시간 고향에 돌아와서 농번기 때 모 심고 돌아간 거예요. 왜냐하면 고향을 그렇게 포기할 수는 없거든요. 그런게 그게 충남까지는 가능합니다. 전라북도부터 가면 불가능합니다. 이동거리가 너무 먼 거예요.

    ▶ 김종배 : 그때 교통, 이런 것 생각하면,

    ▷ 서해성 : 그러니까 아예 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농촌이 비게 되는 거죠. 그것이 오늘날 와서 농촌이 없다, 이런 얘기 하면 안 되는 게 그때 이미 예견된 사실이라는 겁니다. 조금만 더 정책을 깊이 있게 처음부터 추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겁니다.

    ▶ 김종배 : 지금 6269님이 문자주셨는데요. ‘털보아저씨가 누구죠?’, 털보아저씨가 누굴까? 아무튼 ‘귀향, 뜻 깊고 아련한 고향을 멀고 긴 행렬이 함께 했었습니다. 제 기억에 1996년 설, 괄호열고 구정이라고 해주셨네요. 구정 때 하필이면 눈이 아름답게 많이 내려서 예를 들어서 오늘 오후 4시에 출발하여 다음 날 정오 12시에 충청도 천안을 지나가고 있었죠. 이틀 밤을 좁은 차량 안에서 지새우고 설날 낮에 도착해보니 36시간을 걸려서 고향에 도착했던 옛 추억이 더듬어지게 됩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게요. 저희 고향에는 고속버스가 없어서 시외버스였는데 옛날에 입석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때는 흡연단속을 안 해서 바글바글 대는 버스 안에서 담배피우고,

    ▷ 서해성 : 어떤 어른들이 피웠죠. 그리고 사실 입석을 타는 게 맞아요. 어렸을 적에는 표를 끊어도 아저씨가 오면 일어서야 했죠. 그리고 수백 개의 정거장을 거쳐서 가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렇죠. 이게 정리가 안 되면 기사 아저씨께서 급정거 몇 번 해 주시면 통로정리가 싹 되는, 웃으며 할 얘기가 아닌데,

    ▷ 서해성 : 방금 문자주신 분께서 36시간을 걸려서 갔다. 그렇게라도 해서 돌아가야 했던 겁니다. 서울에서 한 번도 안정감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점점 고향이 변하는 걸 느끼게 되는 거죠. 자기의 성소로서의 기억은 소멸되어 가는 거죠.

    ▶ 김종배 : 그때만하더라도 명절에는 무조건 고향을 찾아야 하는,

    ▷ 서해성 : 그래서 그 당시에 학생운동도 많았는데 주로 경찰들이 고향에 내려가서 잡아갔죠. 이런 이야기를 웃으면서 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제 친구들이 많이 설에 고향에 갔다가, 왜냐하면 돈도 없고 친구들한테 손 벌리는 것도 한계가 있고 명절에 가야 되고 그러면 서울에서 형사들이 따라왔죠.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말을 하죠. '집에 데려다줄게, 인사하고 나와라‘.

    ▶ 김종배 : 맞아요. 인사하고 나오라고 했죠.

    ▷ 서해성 : 경찰이 그때는 지금보다 낫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김종배 : 명절만 되면 귀향은 거의 무조건이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요즘은 우리가 명절하면 설 아니면 추석인데 예전에는 그렇지만도 않았거든요. 사실 과거에는 설, 어떤 분이 구정이라고 보내주셨는데,

    ▷ 서해성 : 일제 때 그런 말을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전통 설을 못 쇠게 하기 위해서 신정이라는 이름으로 했었죠.

    ▶ 김종배 : 그런데 설, 추석 말고도 오월단오니 여러 가지가 있었지 않습니까?

    ▷ 서해성 : 1년에 수십 개의 명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제사가 있었죠. 옛날에는 그렇게 새하얗습니다. 그게 아주 중요했습니다. 몇 가지 점이 있는데요. 흔히 알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은 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단오에는 머리를 감고, 이게 굉장히 중요한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부여되어야만 휴식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 김종배 : 하나의 휴식이다?

    ▷ 서해성 : ‘단오에는 머리를 감아야해’라고 말함으로서 그 행위를 모두가 하게 함으로써 단오 날은 적어도 일을 안 하게 하는 거예요.

    ▶ 김종배 : 밭에 김매는 일 하루는 열외.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당시 농사라는 것은 아시지 않습니까? 농사는 오늘하고 6일하고 하루 쉬고 이런 구조가 아니거든요.

    ▶ 김종배 : 월화수목금금금이지. 농사가 휴일이 어디 있어요?

    ▷ 서해성 :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말은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말입니다.

    ▶ 김종배 : 황우석 박사가 만든 말 아니에요?

    ▷ 서해성 : 아니에요. 일본 전국주의 때 만든 말입니다. 2차 대전 때 쉬지 못하게 하려고 일본 해군들이 만든 말입니다.

    ▶ 김종배 : 원조가 일제에요? 이건 또 처음 듣네. 모르는 게 없으세요.

    ▷ 서해성 :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면 그때에는 그렇게 쉬어야 했던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쉴 기회가 없었고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뭘까요? 사실은 그렇게 해야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그것을 핑계로 기름진 음식도 한 번 먹어보고,

    ▷ 서해성 : 그 사람들이 특정한 종교적인 배타성이 있는 분들은 제사를 지내야 되느냐,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30년 전까지는 제사가 정말로 중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이런 농담이 있었습니다. ‘오늘이 생일날이냐?’ 음식을 많이 먹는 것, 평소에는 밥 한 공기에 김치 하나 먹는 게 대부분 음식의 다였거든요.

    ▶ 김종배 : 김치 짠지 하나 갖고 먹고 그랬죠.

    ▷ 서해성 : 그렇죠. 그 얘기입니다. 이런 명절들이 세시풍속이라고 흔히 말하는, 그것을 유지함으로서만 포식이 가능했습니다.

    ▶ 김종배 : 명절이 많았던 이유가 한편으로는 휴식, 또 한편으로는 영양가 보충,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게 중세를 유지시킨 중요한 비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더욱 더 숭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사도 그렇게 해야만 이른바 산해진미라는 늘 제사에 있었지 않습니까?

    ▶ 김종배 : 말 그대로 쌀밥에 소고기국 먹을 수 있는 게 제사 때 말고 언제,

    ▷ 서해성 : 그렇죠. 그리고 생선도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산해진미가 바로 제삿날 가능했던 겁니다. 사실은 조상님 핑계를 댄 거예요. 조상님을 위했다기보다, 지금은 매일 먹는 게 산해진미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이지 그 당시에는 명절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명절을 쇨 수가 없었던, 그런 영양식이 불가능했던 거예요.

    ▶ 김종배 : 죽은 사람을 위한, 산 자를 위한 명절.

    ▷ 서해성 : 산 자를 위한 거였습니다. 그런데 핑계가 얼마나 좋습니까? 할아버지를 위해서, 무슨 귀신이 와서 음식을 먹어요.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때는 식구들이 모여서 음식을 같이 나눠먹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해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떡이나 술 같은 것은 음식량을 현저히 줄이는 식품입니다.

    ▶ 김종배 :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 서해성 : 쌀로 밥을 하면 밥이 늘지 않습니까? 떡은 줄죠.

    ▶ 김종배 : 줄지, 맞아요.

    ▷ 서해성 : 사실은 일상적으로 해먹을 수 없는 거예요. 옛날에 떡이 얼마나 귀했으면 누워서 떡 먹기냐고 그러겠습니까? 사실 체하잖아요.

    ▶ 김종배 : 누워서 떡 먹다 큰일나요.

    ▷ 서해성 : 그런데 옛날에 떡이 얼마나 소중한 거였으면 사람들이 누워서 떡먹기라고 그랬겠느냐고요. 그리고 술도 음식을 확 줄이는 겁니다. 막걸리는 물을 타기 때문에 양이 느는데 나머지는 대부분 술은 줍니다. 사람들이 드라마에서 잘 몰라서 그렇지 조선시대는 사실상 대부분이 금주사회였습니다.

    ▶ 김종배 : 그랬나요? 그런데 우리가 상식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말 그대로 집집마다 비법으로 전해 내려오는 집안의 술이 있고,

    ▷ 서해성 : 가양주가 있었죠. 언제 허용이 됐냐면 공식적으로는 제사 때 두 병 내릴 수 있었습니다.

    ▶ 김종배 : 수량제한까지 있었어요?

    ▷ 서해성 : 있었죠. 그리고 농사 농번기 때 그걸로 힘드니까 먹을 수 있는, 그렇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왕마다 다르긴 했습니다만 정조 때 와서 처음으로 금지령이 완전히 해제됩니다. 정조가 취임하고 나서, 임금은 취임이라고 안하죠. 즉위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조치 중의 하나가 금주를 없애는 겁니다. 왜냐하면 곡식 양이 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이모작을 하면서요.

    ▶ 김종배 : 이모작이 그때 시작됐어요?

    ▷ 서해성 : 네. 이모작이 늘기도 했고 또 하나는 요즘말로 하면 민의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에 통제로 안 된다고 봤습니다.

    ▶ 김종배 : 이런 것까지 나라님이 간섭하느냐?

    ▷ 서해성 :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영조는 술을 마음대로 먹은 사람을 직접 칼로 목을 벴다고요.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렇게 엄했어요?

    ▷ 서해성 : 먹지 말라는데 왜 먹느냐, 이겁니다.

    ▶ 김종배 : 그게 뭐냐면 먹고 살기 힘들어죽겠는데 왜 술로 낭비하느냐?

    ▷ 서해성 : 곡식을 낭비하지 말라는 겁니다. 단, 사대부들은 기생집에서 아무 때나 술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법이라는 게 평민에게 해당되는 거지.

    ▶ 김종배 : 만만한 게 평민이라니까.

    ▷ 서해성 : 그러다 보니 제 얘기는 명절 때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 지금은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지겠지만 특히 음식을 하시는 분들은, 그 습이 있다.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고 적어도 2천년 동안에는 그렇게 해서 영양식을 해왔다는 문화적인 DNA가 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 김종배 : 이런 설, 추석 말고 다른 세시풍속에 따른 명절에도 귀향을 했었던 건가요?

    ▷ 서해성 :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과거에는 귀향할 필요가 없었죠. 다 고향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귀향이라는 말이 본격화된 건 한국전쟁 이후인 거죠.

    ▶ 김종배 : 전쟁이 시작이라고 봐야겠네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부산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얼마나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겠습니까?

    ▶ 김종배 : 그런데 사실 60, 70년대의 탈농, 이런 현상 말고 그 이전에 고향을 등진 게 아니라 고국을 떠나버린, 이런 사례가 먼저라고 봐야 되는 것 아닙니까?

    ▷ 서해성 : 그 얘기를 하려고 하면 아마 일주일 간 방송을 해야, 몇 가지만 정리해서 얘기를 하면 20세기 한국사는 귀향을 요구하는 사회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그만큼 한국인이 나라밖으로 떠났다는 얘기입니다. 참 슬픈 일이죠. 1863년이 되면 함경북도 경성, 이런 데에서 최초의 이민자가 탄생합니다.

    ▶ 김종배 : 1863년에? 그렇게 빨랐어요? 어디로 갔어요?

    ▷ 서해성 : 러시아로 갔습니다. 중국말로는 개심화, 그러는데 거기에 최초로 열 세 가구가 이사를 갑니다.

    ▶ 김종배 : 벌목하러 간 건가요?

    ▷ 서해성 : 아닙니다. 먹고 살 게 없으니까 압록강을 넘은 거죠, 두만강을 넘고요. 그런데 6년 뒤에 1898년쯤 되면 그때 한 해에만 6천명이 건너갑니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당시 월경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걸리면 죽였습니다. 그래서 두만강까지 하얀 옷 입은 시신이 둥둥 떠다닌다. 이런 기록이 실록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 7천명이 두만강을 건넙니다,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민이 시작되었고요. 그리고 하와이 이민, 어떻게 빼겠습니까? 나중에 또 못 갔습니다. 일본이 나중에 하와이 이민을 통제했어요. 왜냐하면 한국인이 하와이 노동이민을 간 것 자체가 무슨 목적으로 간 거냐면 당시 일본인들이 거기서 파업을 일으킨 겁니다. 일본인 노동자들이 하와이에서,

    ▶ 김종배 : 하와이로 넘어간 일본인 노동자들이?

    ▷ 서해성 : 대체인력으로 한국인을 투입한 거예요. 그러니까 일본인 임금이 낮아졌어요. 그 당시 을사늑약으로 일본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노동이민을 금하는 거예요. 비극적으로 재미있는 일은 뭐냐면 그중에 배 한 척이 이미 떠났습니다.

    ▶ 김종배 : 금지령 내리기 직전에?

    ▷ 서해성 : 하와이에 닿을 수가 없잖아요. 이 배가 어디론가 가야 했어요. 그래서 멕시코 칸쿤으로 갔습니다.

    ▶ 김종배 : 멕시코에 갔어요?

    ▷ 서해성 : 네. 그래서 멕시코에 한인들 일부가 살고 있는 겁니다.

    ▶ 김종배 : 칸쿤은 휴양지 아니에요?

    ▷ 서해성 : 휴양지죠. 그런데 칸쿤에 갔는데 그중에 일부가 다른 곳으로 또 떠났습니다.

    ▶ 김종배 : 어디로 갔어요?

    ▷ 서해성 : 그게 쿠바입니다.

    ▶ 김종배 : 쿠바로도 갔어요?

    ▷ 서해성 : 그 건너편이 쿠바거든요. 지금 현재 거기 있는 한인들이 바로 그때 간 사람들입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나중에 정치적으로 쿠바가 좋아서 간 게 아니고 그때 갔던 겁니다.

    ▶ 김종배 : 그때는 쿠바혁명나기 한참 전인데,

    ▷ 서해성 : 그렇죠. 쿠바혁명은 상상도 하지 못한, 그렇게 하와이 이민이 그런 것이고요.

    ▶ 김종배 : 흘러흘러, 말 그대로 흘러흘러 쿠바까지 간 거네요.

    ▷ 서해성 : 나라가 없는 사람들이죠. 노예로 간 것이죠.

    ▶ 김종배 : 만주로도 많이 갔잖아요.

    ▷ 서해성 : 만주로는 200만 가까이 갔습니다. 해방이 될 당시에 일본에 230만이 있었고요. 중국에 220만이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때 전체인구수를 보면 어마어마,

    ▷ 서해성 : 3천만 중에 500만 명이 해외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귀향에 대해서 얼마나 한국인이 절박한지 이해가 가잖아요.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있고 트랜스내셔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트랜스내셔널이라는 말은 자진해서 간 겁니다. 얼핏 보면 한국인 중에 일부는 자진해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강제된 거예요. 한국인의 역사적 운명으로 봤을 적에. 제가 큰 틀에서 포괄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당연히 그렇죠, 2천 년 전에 쪼개졌기 때문에. 그것은 빼고요. 그러고 나면 가장 많이 나가있는 사람들이 아일랜드 사람들입니다. 그때 포테이토파민이라고 해서 대기근 때 1840년대에 미국으로 주로 간 거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지부시, 케네디,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 후손들이죠. 그 사람들 말고 그것은 특별한 일이니까 현재 지구상에서 해외동포가 가장 많은 사람이 한국인입니다.

    ▶ 김종배 : 중국인이 아니에요?

    ▷ 서해성 : 아닙니다. 중국인은 인구의 2%가 하교입니다. 15억 중의 2%라는 겁니다. 한국인은 7천만 중에 현재 700에서 800만 명이 해외이민.

    ▶ 김종배 : 비율로 따지면 압도적이네요.

    ▷ 서해성 : 압도적으로 세계에서 많은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탈향된, 고향에서 떠난 사람이 천만 명입니다. 큰 통계를 보십시오. 한국인이 왜 그토록 귀향, 귀향하는지. 고향에서 떠난 사람이 천만 명이라고요. 피난민이 천만 명입니다.

    ▶ 김종배 : 일제강점기 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 서해성 : 6.25때 이산된 게 천만 명이라고요. 그리고 고향에서 농촌분해해서 떠난 사람이 천만 명이에요. 그리고 다시 일제강점기 포함해서 지금까지 해외에 살고 있는 사람이 700에서 800만 명이에요.

    ▶ 김종배 : 그중에는 박정희 정권 때 경제성장기에 파독광부, 파독간호사,

    ▷ 서해성 : 그런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겁니다. 파독간호사만 해서 만 천명, 광부만 해서 7, 8천명 갔거든요. 20년간 갔다 와서 그렇지 중동에도 수백만 명이 갔다 왔습니다. 지난 20세기 한국사를 보면 어떻습니까?

    ▶ 김종배 : 종합해서 숫자를 말씀하시니까 어마어마하네요.

    ▷ 서해성 : 우리 인구총량을 넘습니다. 연인원 다 따지면요. 무슨 이야기냐면 20세기 한국사는 거대한 디아스포라가 됩니다. 그러다보니까 한국인이 귀향해야 되는 강박 같은 게 전 세계적으로 특이한 현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 김종배 : 고향의 관점에서 보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세는 게 오히려 더 빠른,

    ▷ 서해성 : 훨씬 빠르죠. 한국인이 20세기 내내 한 일이 뭐냐면 어디론가, 그리고 또 일부러 고향을 떠난 유학생들, 이렇게 따지면 한국인은 지금까지 안주하지 못한 채로 계속 떠돌고 있는 겁니다.

    ▶ 김종배 : 여기서 조기교육, 조기유학은 뺍시다.

    ▷ 서해성 : 그것도 몇 십만인데 빼죠.

    ▶ 김종배 : 이건 성격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엄청나네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귀향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아주 각별한 의미를 띄고 있다.

    ▷ 서해성 : 거대한 상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정말 서울이라는 도시, 부산이라는 도시, 광주라는 도시들이 살만한 도시가 되는 게 진짜 중요하다. 그래서 성소가 되고 사람들에게 상실감을 더 줘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뭘 계속 소개해야 된다고 앞에서 하고 있는데,

    ▶ 김종배 : 괜찮습니다.

    ▷ 서해성 : 괜찮습니까? 피디가 자꾸 뭘 하라고,

    ▶ 김종배 : 얘기 몰입되어 있는데, 계속 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알아서 끊을게요.

    ▷ 서해성 : 그중에 뺄 수 없는 게 며칠 전이 80주년이었는데 주로 시베리아에 사시다가, 고려인들. 우리 20세기 역사를 생각하면 그런 면에서 한국인이 정말 죽지 않고 세계 10위 반열에 올라선 겁니다. 전 세계에서 식민지 없이 세계 10위 반열에 올라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다른 모두 나라는 과거에 식민지를 가졌거나 현재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 김종배 : 옛날에 그 짓해서 지금의 경제를 일구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참 대단한 거예요.

    ▷ 서해성 : 대단한 나라입니다. 아시아에서 민주적 성과가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 김종배 :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의는 한 30%밖에 안 되고 타의가 더 큰데 그렇게 떠나간 분들, 그리고 그 후손들을 고국이 안아야 되는데 제대로 안고 있지 못하니까,

    ▷ 서해성 :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현재 우리나라 들어와 있는 이주민이 200만쯤 됩니다.

    ▶ 김종배 : 이주민이라는 게 외국인노동자 말씀하시는 건가요?

    ▷ 서해성 : 외국인노동자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200만이 넘는 걸로 보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주민노동자가 유입하는 숫자가 가장 빠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밖에 한국하고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가 같은 사람들이 700에서 800만 명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하고 뭘 같이 해보려고 하는 프로그램이 적극적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가슴에 손을 얹고 재중동포들을 같은 동포로 얼마나 우리가 가슴을 열고 생각하고 있는가? 물어봐야 되는 거죠. 고려의 후손들을 같은 핏줄이라고 정말로 솔직히 생각하고 있는가?

    ▷ 서해성 : 혈연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무슨 이유로인가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죠.

    ▶ 김종배 : 그렇죠. 역사의 피해자이고 희생자들 아닙니까?

    ▷ 서해성 : 그들하고 뭔가 동행할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게 사실은 오늘 같이 출산율도 저조한 사회에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게 이런 말하면 가슴이 아픈데 전 세계에서 한국이 고아수출을 제일 많이 한 나라입니다. 얼마나 많은 유이민이 한국을 떠나갔냐는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에서 버린 아기들이죠. 그 사람들을 위해서 청이 하나 있어야 된다고 봐요, 무슨 기관이. 적어도 소년, 소녀들은 언제라도 고향에 돌아오면 환영해주겠다고 하는, 우리가 버렸기 때문에. 이분들에 대해서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 김종배 : 오늘도 역시 또 대한민국 사회에 강렬한 메시지와 문제제기를 서해성 작가께서 해주셨는데 얼추 마무리를 해야 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하나만 제가 따로 여쭙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들어서 나타나고 있는 흐름이 이른바 귀농, 귀촌현상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주제가 귀향이니까 여쭤보는 건데 이 현상은 어떻게 읽어야 되는 겁니까?

    ▷ 서해성 : 사실 귀농, 귀촌이라는 게 이른바 IMF외환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도 또한 자발적이지 못하다는 겁니다. 자기 선택은 자발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때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그때 이른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30, 40대가 쫓겨났지 않습니까? 말이 그렇지 30, 40대에 쫓겨났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 김종배 : 지금 자영업 비중이 높다고 하는게 그때 쫓겨난 사람들이 자영업을 하는,

    ▷ 서해성 : 전 세계에서 한국이 자영업 비율 4위인데요. 그 말은 1등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나라가 그리스, 이탈리아, 멕시코입니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입니다. 그 말은 무슨 이야기냐면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나라라는 거예요. 그런데도 한국인이 애국심이 높아요. 참 놀라운 사람들이에요. 97년에 외환위기, 98년에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그 당시에 떠난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아버지가 농사짓는 것 봤고, 어머니가 모심는 것 봤고, 이런 사람들이 떠난 거죠. 그러다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2002년 쯤 되어서. 그런데 다시 근래에 와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2009년에 4천 명, 이렇게 되었는데 그게 2008년 금융위기하고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김종배 : 세계금융위기 말씀하시는 거죠?

    ▷ 서해성 : 네. 다시 근래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 말은 단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시 삶에서의 고통, 거기서부터 벗어나고 싶은 분들이 선택하는 것인데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농촌분해가 됐던 때에서부터 가령 농업생산물 가격이, 이미 국제시장에 우리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농업생산물을 생산해서 살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입니다.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되는데요. 마무리발언 기회를 조금 이따 드리고 제가 하나 확인하고 마지막 마이크를 서해성 작가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마무리해야 될 시간인데요. 제가 왜 마무리인사를 미루어놨냐면 서해성 작가의 신청곡을 받아서 엔딩곡으로 틀어드리기 위해서, 어떤 신청곡 있으신지 말씀해주시면 바로 틀어드리겠습니다.

    ▷ 서해성 : 제가 추천하고 싶은 것은 ‘관타나메라’라고 하는,

    ▶ 김종배 : 아까 쿠바에 말씀하셨는데,

    ▷ 서해성 : 쿠바에 가신, 정말 나라가 없어서 쿠바까지 가셨던 그분들, 1,200명 정도 됩니다. 그분들은 당연히 이 방송을 못 들으시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분들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하는, 1905년에 가셨는데 그분들을 위해서 꼭 듣고 싶은 이유가 이 ‘관타나메라’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쿠바에서 애국가 비슷한 것입니다. 쿠바 국가가 생기기도 전에 쿠바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신 분이 이 노랫말을 썼거든요. 관타나라고 하는 유명한 쿠바의 지역입니다. 거기에서 나온 건데 그 노래를 들으면서 잊지 않아야 된다는 것, 그렇게 떠난 분들이.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존속할 이유가 무엇이 있고 민족이 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 김종배 : 저는 여기서 인사드리고요. 서해성 작가께서 DJ가 되셔서 노래 소개해주시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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